준비하는 사람과 계획없는 사람-거제도 임진왜란 전적지
거제도와 조선수군의 극과 극(2015. 5. 3)
3일 아침
부산에 사는 동생과 질녀 둘이 우리와 함께 길을 나섰다.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걱정했지만
심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라서 오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한 가지가 좋으면 한 가지가 나쁜 법
해운대에서 가덕도 입구까지 막힘없이 잘 달렸다.
부산 신항만을 지나 가덕도를 향해 가는 길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니 사진을 찍으라고 해서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사진을 찍었다.
지극히 문과스러운 아내에게 지극히 이과스러운 내가 잔소리를 해 가면서 얻은 사진.
지극히 문과스러운 아내는 결국 가덕도 넘어가는 다리는 이렇게 찍었으나
가덕도에서 거제대교 들어가는 해저터널은 찍지 못했다.
"흥! 나에게 뭘 바래?!"
비바람이 심하기도 하고 잠시 화장실도 다녀올 생각으로 가덕도 휴게소에 들렀다.
우산을 써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바람이 심했다.
대단한 기술을 써서 지었노라고 자랑해 놓은 홍보관을 보면서 생각했다.
해저 46m 표시를 보면서 지나왔지만, 머리속에 드는 생각은
서해안에 그 깊이 속에 억울하게 수장된 세월호 피해자와 가족들 뿐이었다.
가덕도는 1592년 4월 13일(음력) 조선으로 쳐들어 오는 왜군을 맨처음 발견한 곳이다.
지금의 영도인 절영도에서 사냥 겸 훈련을 하던 부산진 첨사 정발은 병사 6백명에 불과했지만
고니시의 1만5천 선봉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다.
프로이스 신부가 고니시에게 들어서 남긴 기록에는 새벽 3시~4시 사이에 시작한 전투는 3시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조선군 전부는 훌륭한 무사들이었고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 생포당한 몇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을 때까지 싸웠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조선이 전쟁에 대한 대비를 거의 하지 않은 것처럼 알려져 있고
그것으로 조선 정부의 무능을 비웃지만
프로이스 신부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전쟁 전에 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을 많은 군대, 강한 활, 소총, 화포 등을 갖추고 있었고
수군은 강하고 큰 선박, 뚜껑이 있는 선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군대의 무장은 강철과 무쇠로 만든 투구를 쓰고 있으며, 화살이 뚫기 힘든 강한 가죽 갑옷, 투르크 활처럼 강력한 활,
심지어 소총, 던지면 폭발하는 무쇠솥 같은 다양한 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성의 해자는 깊고 마름쇠를 깔아놓아 접근이 힘들었고
수군은 일본의 전함보다 훨씬 더 크고 강력해서 일본 수군을 항상 위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래성에는 무려 2만명이 집결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 초기에 힘없이 무너진 것은 실전경험이 전혀 없었던 이유가 크다.
가덕도 앞바다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거가대교를 넘어 거제도로 들어선 다음 우리는 원균이 조선수군을 말아먹은 현장인 칠천도로 향했다.
칠천도는 거제도 본섬의 서쪽에 좁은 칠천량(칠천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섬이다.
칠천량해전 공원은 칠천도 남쪽에 있는 공원이다.그 곳에 잘 만들어 놓은 전시관이 있다.
1597년 7월 15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전투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군사적인 면에서 바보는 아니었는지 원균은 삼도수군으로 부산포를 공략하는 것이 택도 없는 것을 깨닫고
안골포의 적을 육군이 먼저 공략하고 나서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가 권율에게 곤장을 맞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출전한 원균의 수군이 어떤 과정을 겪으며 칠천량에서 소멸되었는지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597년 음력 7월 14일(양력 8월26일)
초 7일 왜선 오백 여 척이 부산에서 나오고, 초 9일 왜선 천 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부산시 영도구 영도) 앞 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다섯 척이 표류하여 두모포에 닿았고, 또 일곱 척은 간 곳이 없다.
1597년 음력 7월15일
가장 늦게 중군 이덕필(李德弼)이 왔다.... 그에게서 우리 수군 스무 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분통이 터진다.
음력 7월18일
새벽에 이덕필(李德弼), 변홍달(卞弘達)이 전하여 말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元均)․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충청수사(최호) 및 여러 장수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대패했다.”고 했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음력 7월 21일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李天樞)가 군에 있고, 백성들도 많이 본업에 힘써, 혹 이른 곡식을 거두어 들이기도 하고, 혹 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낮에 점심을 먹은 뒤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安衛), 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 등 여남은 명이 와서 통곡하였으며, 피하여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보므로 패하던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元均)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함께 이야기했다. 밤 세 시(四更)가 되어도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생겼다.
그 때 일에 대해 선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김식의 보고를 받은 비변사에서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상이 이르기를, “주사 전군이 대패한 것은 천운이니 어찌하겠는가. 원균은 죽었더라도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각도의 배를 수습하여 속히 방비해야 할 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척후병도 설치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후퇴하여 한산(閑山)이라도 지키지 못했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한산에 거의 이르러서 칠천도(七川島)에 도달했을 때가 밤 2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이용하여 잠입하였다가 불의에 방포하여 우리 전선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창졸간이라 추격하여 포획하지도 못하였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적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육지에 내려보니 왜적이 먼저 하륙하여 이미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지만 어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兩湖) 지방을 방수(防守)해야 한다.”고 하였다.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군사를 움직이는 일에 문외한인 임금이 멀쩡한 수군을 전멸시킨 장본인이었음에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하늘 탓을 하고 있다. 유체이탈화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이 언젠가 조선수군의 힘으로 부산포를 직접 공격할 수 있도록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뒤부터
5년간 180여척의 전함을 건조하고 1만8천명의 수군을 양성하였다.
이순신은 임금의 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통제사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한양으로 압송당했다.
지도에서 보듯이 우수영을 떠나 견내량을 나서면 장문포왜성부터 울산왜성까지 줄줄이 육지에 있는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부산으로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현장 지휘관으로서 이순신의 판단은 매우 정확했다.
원균도 부임하고 나서야 저 상황을 알고 출전을 하지 않으려고 꼼수를 쓰다가 권율에게 끌려가 곤장을 맞았던 것이다.
어찌됐건 이순신이 5년간 준비했던 조선 수군을 전투에서 사용해보지 못했고
수군은 하룻밤 사이에, 해전이 아니라 육지에 물뜨러 갔다가 몰살당하는 어이없는 패배를 당했다.
"부월을 받고 전장에 나간 장수는 왕명이라도 받지 않는다"는 전쟁의 원칙은 묵살당했다.
이순신은 늘 압도적인 군세로 왜군을 제압하는 전투를 통해 군사들의 사기를 최대한으로 유지했고
절대로 무리하지 않음으로써 일본군 15만명의 발을 묶었던 것이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에 있었던 폴투갈의 프로이스 신부가 고니시에게 들어서 남긴 기록에 따르면
조선해적(일본군은 조선수군을 해적이라고 표현했다)은 일본군의 배보다 엄청나게 크고 빨랐다고 한다.
조선수군은 화약솥을 일본군의 머리위에 던져 폭발시켰으며
일본군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강력한 갈고리로 일본군 배를 묶은 뒤 일본군을 남김없이 도륙하였다고 한다.
조선수군을 당해낼 무기가 아무것도 없어서 바다에서 일본군은 그저 속수무책을 패전과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 조선수군의 조직표를 보여주는 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위기에 대처하는 위정자들의 한심함인데
전쟁이 끝난 뒤에 이따위 오륜행실도나 인쇄해서 백성들에게 배포한 것이다.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국가체제 개선보다 이런 윤리도덕 이야기나 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주자학이 이나라에 들어와 끼친 가장 큰 해악은
"그대들의 주둥이로 오랑캐를 쳐 부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라고 광해군이 신하들을 비웃으며 한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해서 저런 류의 책이나 찍고 있었으니 우리는 절대 저런 조상을 본 받으면 안될 것이다.
칠천량 공원에서 바라본 바다
실전 경험 풍부한 1만 8천명의 수군과 180여척의 전함.
저 바다에서 숨진 수군들은 얼마나 원균을 원망하며 죽었을까?
사람 하나 바꾼 것 뿐인데 5년간 패배를 모르던 수군이 단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재 한명이 만명을 살릴 확률보다 바보 한명이 만명을 죽일 확률이 훨씬 높은 듯하다.
거제도 서북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질러 늦은 점심을 옥포에서 먹었다.
그리고 나서 준기가 보고 싶다는 옥포해전공원을 찾아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오후 5시가 넘어서 도착해 전시관 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안타까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첫번째 해전을 치른 옥포 앞바다는 지금은 조선소가 들어서 있다.
명종임금 때 삼포왜변을 계기로 기존의 맹선 대신 판옥선으로 전선을 교체하였고 함포를 대량으로 장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옥포해전에서 조선은 강력한 당파전술과 함포를 사용해 적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섬멸시켰다.
1592년 음력 5월 6일
전라좌수영 군사들이 주축히 되어 치른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그동안 갈고 닦은 전술을
이순신의 지휘 아래 옥포해전에서 마음껏 실전에 적용하는 기회를 가졌다.
80척을 동원한 조선 수군은 적선 30척을 상대로 26척을 격파하고 무수히 많은 적을 참살하였다.
아군의 피해는 부상자 1명. 일방적인 해전이었다.
조선 수군이 입은 거짓말 같은 피해는 바로 일본군보다 압도적으로 큰 판옥선과 강력한 화포의 힘이었다.
적이 접근할 틈을 주지 않는 일방적 공격으로 얻어내는 승리.
한 세대 전에 있었던 수군의 전략 개편
그리고 준비된 장수와 군사들이 한 몸처럼 움직여 이뤄낸 승리였다.
미리 준비한 자가 거두는 당연한 수확,
이순신을 성웅으로 만들고 우상화 작업을 하면 우린 그저 요행만 바라는 바보가 될 뿐이다.
빗발이 잦아들지 않아 다른 일정은 모두 포기하고 숙소인 거제자연휴양림을 향했다.
한 달 전에 예약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매일 취소분이 나오는지 들락날락하다 5월1일 아침에 비어있던 수련관을 예약했다.
평일요금이 적용되어 20인용 거대한 숙소가 고작 10만원이었다.
연휴라서 펜션은 4~5인용이 20~30만원씩 요금을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