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복천동 가야고분
2015. 5. 2.(토)
징검다리 연휴인데다 아이들 학교에서 <봄 단기방학>을 시행하여 가족이 함께 여행하기 좋은 기회가 왔다.
준기의 제안으로 남해안에 있는 가야 유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려가는 길이 예상대로 많이 막혀서 경주 용담정과 양산 통도사는 다음에 기회를 보기로 하고
부산에 있는 동생 집에 도착해 하룻밤을 잤다.
2일날 아침,
처음 계획을 세울 때는 아들과 부산 지하철을 이용해 돌아보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많으니 차를 가지고 다니자는 동생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오늘 계획은 오전에 충렬사 - 동래읍성 - 복천동 가야고분 - 복천동 박물관 - 밀면으로 점심을 먹고 김해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다.
먼저 도착한 충렬사는 괜히 왔다 싶다.
지극히 개발독재스러운 국적불명의 시멘트 덩어리 구조물.
그리고, 저런 위압적인 계단구조의 건축물 배치는 다른 민족을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자들이
복종을 강요할 때 주로 사용하는 모습이라서 매우 거슬렸다.
이 건물 안에 배향된 분들은 모두 백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져 적과 싸웠던 분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저런 위압적이고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배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1592년 음력 4.13.일
첫번째 전투에서 10만 대군을 3천명의 병사로 맞서 싸우다 전사한 부산진 첨사 정발,
다대포 첨사 윤흥신, 그리고 왜군들도 인정했던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선열 89분의 위패.
이런 사람들을 이런 형태의 건물에 모시기에 부끄럽지 않았을까? 설계자의 건축 철학이 의심스러웠다.
위압적인 건물에서 내려와 후손들과 대화하는
친밀한 선조로 만들면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처음 준기와 계획을 잘 때
충렬사에서 동래읍성까지 산길을 걸어가보려고 했는데
차를 타고 복천동 박물관 주차장으로 가게 되었다.
일명 복천동 가야고분군.
동래읍성 아래쪽으로 연결된 묏부리 끝인 저 멀리에 가야시대 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다.
'왜 가야의 지배자들은 산 꼭대기도 아닌 이 언덕 위에 큰 봉분을 만들었을까?'
언덕 끝에 서서 고등학교 때부터 가졌던 의문을 떠올렸다.
사진으로 봤을 때와 달리 무덤 자리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가장 좋은 자리였다.
평야가 좁은 지역에서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한 산업인 농업 지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왕국 전체를 내려다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 바로 여기였다.
내가 이 지역의 지배자였다면 나 역시 이 곳에 무덤을 정했을 것이다.
복천동 고분을 발굴하고 나서 가장 상태가 좋은 무덤을 노천 박물관 형태로 만들어 보전하고 있었다.
구덩식 돌덧널무덤(53호분)과 딸린덧널이 있는 덧널무덤(54호)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발굴 당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하고 정교한 토기, 철강왕국임을 증명하는 철정(덩이쇠), 각종 장신구 등 고대왕국의 위세품이
잘 드러나 있다.
발굴이 끝난 고분은 이렇게 표지석을 붙이고 수목조경으로 구획을 표시해 놓았다.
나는 학교에서 가야왕국이 고대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연맹체제로 머물고 말았다고 배웠는데
개인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중국이나 한반도에 가야처럼 4백~6백년간 존속한 국가체제가 몇이나 있었던가?
금관가야나 대가야는 고려나 조선보다 더 오래 존속한 왕조였다.
비록 문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한 체제가 4백~6백년간 존속하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복천동 고분에서 발굴한 7주령을 박물관 표지로 사용하는 복천동 박물관이 보인다.
저 멀리 산 줄기를 따라 동래 읍성이 하얀 띠처럼 이어져 있다.
저 성에서 임진왜란 때 송상현 부사를 비롯한 동래 군민들이 왜군과 맞서 싸웠다.
복천동 박물관 들어가는 길에 영보단 표지석이 서 있다.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해 조선의 호구체제를 일본식 호적제도로 바꿀무렵
조상의 이름이 적힌 호구단자가 함부로 버려지는 것을 걱정한 주민들이
이 곳에 동래지역 13개면 호구단자를 모아 태우고 그 위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음력 4월23일마다 이를 기리는 잔치를 벌렸으며 1915년 영보단이라는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박물관 안에는 복천동 가야고분 발굴 배치도를 입체적으로 표현해 놓은 조형물이 있다.
53호와 54호 고분은 야외 전시장으로 만들어 놓았고, 다른 고분들은 사각형 식물배치로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복천동과 김해 일대를 수백년간 지배하던 가야는 찰갑과 철갑기마대로 무장한 광개토태왕의 고구려 군대가
이 땅으로 밀고 내려오면서 화려한 역사를 접고 쇠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