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여행

강화도, 고려시대의 유적을 찾아서

연우아빠. 2015. 3. 8. 19:51

강화도 고려시대 유적을 찾아서(2015.3.1)


지난 겨울방학 동안 가족여행을 한번도 가지 않았다고 아들에게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여행에 대한 동력이 영(0)에 가깝게 떨어져서 10여년 만에 처음 겨울방학 동안 여행을 하지 않긴했다.


생각해보니 국내에 웬만한 곳은 다 한번씩 다녀온 것 같고

딸도 고등학생이라 여행에는 아예 끼지 않으려고 하니 좁은 나라를 탓해야 하나

아니면 학업(?) 핑계로 여행을 차압당하는 불쌍한 나라를 탓해야 하나?


내년이면 아마도 가족들과 떨어져서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을테고

아들마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싫던 좋던 대학입시에 매달려야 할테니

어쩌면 올해가 마지막으로 아들과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들의 성화도 있고 해서 국립자연휴양림 예약에 모처럼 나서서

다행스럽게 4월 첫째주 예약에는 성공했지만

지금 당장 강화도를 가 보자고 하는 아들의 여행 기운에

아직은 쌀쌀한 길을 나서 본다. 


올 한해 동안 여행(캠핑)계획을 대충 세우고 나니

그래도 의욕이 조금은 생긴다. 


3월 1일, 아들이 강화도를 가자고 세운 계획에 따라 길을 나섰다.


아들과 단 둘이서 가는 답사 여행,

강화도는 이미 여러차례 답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고려의 왕릉을 찾아가 보자는 계획.


저금통에 모아둔 동전을 톨게이트 비용으로 쓰려고 주머니에 담았다.

가는 길에 10원짜리, 100원짜리, 500원짜리로 분류해 톨게이트에서 사용했다.


10월짜리 계산하는데 신경쓰다가 자주 헷갈리는 길목에서 톨게이트를 놓쳐서 그만 한강 북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 때문에 초지대교로 들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돌려던 계획을 고쳐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 오는 것으로 수정.




주차장이 있긴 했는데 하루종일 대 놓는 차가 대부분인데다가 시내버스 회차터로 쓰고 있어서 차를 댈 곳이 없었다.

겨우 겨우 나가는 차가 한 대 있어서 한 귀퉁이에 차를 댔다.


바람이 매우 셌다.

연무당 옛터, 원래 강화성을 지키는 군인들의 훈련소로 1870년에 새로 창건한 곳이다.

지금은 이렇게 표지석만 있는데 이곳이 바로 1876년 병자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맺은 곳이다.

임진왜란 때 시작된 일본의 집요한 침략의지는 결국 284년만에 성공을 거두었다.

왜란 침략군 제3군 사령관인 구로다의 후손과 방어사령관이었떤 삼도 순변사 신립의 후손 신헌이

조-일 양국 대표로 이 자리에서 침략의 길을 열어준 조약을 체결했다.



강화 석수문


연무대와 잇달아 강화산성을 이루는 성벽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강화석수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해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른다.

1711년(숙종 37년)에 축조했다고 한다. 1992년에 원래 자리였던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수원성에 있는 방화수류정과 같은 느낌을 준다.



강화도 읍내를 지키는 내성이 산을 따라 계속 이어져 있다.

복구는 여러차례 걸쳐서 만든 흔적이 뚜렸이 남아 있다.

성곽 윗부분은 삼수병 제도가 정착된 뒤에 추가로 증축한 모습이다.


아들이 예전에 강화도 답사를 왔다가 점심을 먹었던 우리옥에 가서 밥을 먹자고 한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기도 하고, 점심 먹고 나서 좀 걷는 것도 괜찮을 듯 하여 연무당에서 800m쯤 떨어진 식당까지 걸어갔다.

처음에는 지도 앱을 보면서 갔지만, 지름길을 발견해 길을 많이 단축했다.

가는 길에 개를 무서워하는 준기를 위해 <도시락>에 관련된 1980년대 유머를 들려 주었다.


우리가 자리잡자 마자 예약한 초등학생 아이들이 한가득 식당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2층으로 자리를 옮겨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오늘 답사의 주 목적은 강화도에 있는 고려왕릉 4군데를 모두 돌아보는 것.

그 첫번째로 고려 고종의 홍릉을 찾았다.

홍릉은 강화도 학생수련장을 지나 산을 한참 올라간 곳에 있었다.


고종은 스물두살에 임금이 되어 46년간 황위에 있었다.

최충헌의 무신정권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한데다, 몽골침략군에 맞서 싸운 시대라서

평생을 안온하게 보내지 못했다. 그는 태자인 전을 쿠빌라이에게 보내 항복을 하고 말았다.

결국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섬에 묻히고 말았다.


비참한 고려의 상태는 초라한 왕릉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호석도, 기단도 없이 평범한 사대부보다 못한 초라한 무덤이다.

홍릉임을 알리는 비석 옆에 제단이 있는데, 강화도에 있는 다른 왕릉에는 제단마저도 없었다.


왕릉 오른쪽에 이런 돌이 놓여 있는데 용도를 모르겠다.

가운데 앞쪽에 있는 돌에는 큰 구멍이 두개 뚫려 있었다.



고종릉으로 올라오려면 이렇게 가파른 길을 한참을 올라와야 한다.

고려시대에 이 곳까지 상여를 메고 올라왔을 백성들의 고단함이 전해온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귀곡산장을 느낌을 주는 외진 길이었다.



홍릉에서 내려와 가릉을 찾아갔다.

가릉을 찾아 가는 길에 삼거리에서 충렬사라는 표지를 발견했다.

무엇인지 확인을 하려 내렸는데 병자호란 때 죽은 김상용을 비롯한 26명을 모신 사당이라고 한다.

원래 현충사라고 하였으며, 효종임금이 전답과 현판을 내려 그 때부터 충렬사라고 한다고 한다.

 


원종 임금의 왕비인 순경태후를 모신 가릉


가릉으로 가는 길은 도로 공사중이어서 네비게이션 안내와 좀 달랐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지도 앱을 검색해 보니 거리가 제법 나왔다.

처음 가는 길이라 지도 앱을 따라 가다가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 같아서 중간에 마을을 가로 질러 걸어갔더니

예상했던 대로 가로지르는 길이 나왔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서 그런지 이 동네 개들이 단체로 짖어댄다.

개도 참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눈을 마주보면서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 "쉬!"라고 하면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짖기를 그만두는

개가 있는가 하면, 겅충겅충 뛰면서 더욱 요란하게 짖는 개도 있다.

해를 가할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눈을 가진 개도 있는 것 같다는... 


가릉은 마치 갓 쓴 사람 머리처럼 특이하게 만들어 놓았다.

발굴한 뒤에 이렇게 유리문을 달아 놓았는데 주변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울타리를 둘러 놓았다.



가릉에는 이렇게 뚜렷하게 음각이 된 석상이 서 있는데

문인상도 무인상도 아닌 것 같은 독특한 모습이다.

마치 삼장법사 같은 모습?


가릉의 특이한 점은 능 뒷편에 이렇게 개처럼 생긴 석상이 있다.

무덤 주위를 수호하는 것 같은 모습인데 옆에서 보면 정말 무덤을 지키는 오수개 같은 모습이다.

가릉은 남한에 남아 있는 고려왕실 가운데 가장 밝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가릉 근처에 능내리 석실분 안내 표지가 보여서 찾아갔다.

여러개 기단 위에 있는 이 무덤은 발굴 당시에 내부에서 청자 조각과 함께 봉황문양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봉황문양은 전통적으로 왕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몽항쟁기 강화에서 사망하였으나 능이 확인되지 않은 

희종의 왕비인 성평왕후나 고종의 왕비인 안혜태후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가까이 가 보면 왠지 범상치 않은 포스가 풍기는 구조물들이 조금 남아 있다.

이 무덤 앞쪽에는 건축물 기초석 인 듯한 주춧돌이 남아 있다.


고려왕실은 최충헌에게 끌려와 강화도에서 초라하게 흔적을 남겨 두었다.



이 곳은 고려 21대 임금인 희종의 능(석릉)이다.

희종은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강화도 건너편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1237년 용유도에서 승하하였다.

그나마 석릉은 봉분 주위에 ㄷ자 모양으로 석축이 둘러져 있어 왕릉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석릉을 깊은 산 속에 있어서 차를 마을 교회에 대고 걸어갔다.

2km 이상 산길을 걷고 고개를 넘어야 이 곳에 도착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상여를 메고 이 험한 길을 왔을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느껴진다.


석릉에서 내려와 곤릉을 찾아갔다.

곤릉은 강종임금의 왕비인 원덕태후의 능이다.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가는 좁은 길을 따라 조심조심 올라갔지만

우리 앞에는 해병대 사격장임을 표시하는 경고문과 함께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다.

접근금지, 촬영금지 경고사격 표시가 오싹하게 한다.

차에서 내려 보니 건너편 산 중턱에 곤릉이 보였다.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네비게이션 상으로는 찾을 수 없어서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고려 왕실은 죽은 다음에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이곳은 동국이상국집을 지은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문사 이규보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사로잡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뒤, 이규보는 그 때까지 전해오던 

고구려의 역사를 모아 동국이상국집을 편찬했다.


훌륭한 문사였으나, 최충헌을 비롯한 군사독재정권이 서슬 퍼렇던 시절의 위세에 타협해

최충헌을 찬양하는 글을 써서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했다.



그의 무덤이 당시 고려왕릉보다 더 규모가 크고 자리도 좋다.

혹시 당시 신료들은 왕릉이 몽골군에게 침탈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깊은 산속에 모셨던 것일까?



드디어 오늘 강화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삼랑성에 도착했다.

삼랑성은 단군왕검의 아들인 부루, 부소, 부우 3형제가 쌓은 것으로 전해오는데

이 성은 1866년 병인양요 때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 극동함대를 격퇴한 

양헌수 장군의 전적지인 정족산성으로도 알려져 있다.


동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정족산을 걸어 올라갔다.

전등사 관람료를 내고 성문을 넘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입구에는 프랑스군을 격파한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있다.



전등사 경내에 티벳불교에서나 볼 수 있는 마니차가 있다.

지금은 고장이 나서 돌릴 수 없다고 한다.

해남 두륜산에 있는 대흥사 경내에도 이와 같은 것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도 보다니...



전등사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



경내를 지나 한참을 올라가면 조선왕조실록 4대 사고 중에 하나인 정족산사고가 나온다.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을 복간하여 다시 네군데 사고에 분산보관하였는데

마니산 사고에 보관하던 것이 1653년 불이나 이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1910년 일제는 이 사고의 실록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겼는데, 사고 건물은 1931년 전후에 파괴되었다가

1999년 지금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정족산성 안에는 고려 고종이 몽골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하였을 때 임시 궁궐을 지었던 터가 남아 있다.


강화도는 강화진위대라는 신식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군을 해산시켰는데, 이듬해인 1908년 이능권의 지휘 아래 옛 진위대 소속 병사들과

의병들이 10월30일~31일 사이에 일본군 13연대와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능권은 이곳에서 대동창의진을 조직하여 항일전쟁에 참여했다.


온 가족이 함께 움직일 때에 비해 아들과 단 둘이 움직이니 적은 시간에 많은 곳을 돌아 볼 수 있었다.

오전 11시에 강화도에 도착해 오후 4시에 답사가 끝났다.

삼랑성으로 내려오면서 맛있는 해물파전을 간식으로 먹고 초지대교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