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여행

서울 동북쪽 조선왕릉 둘러보기

연우아빠. 2014. 8. 4. 20:30

서울 북동쪽 지역 조선왕릉 둘러보기

2014. 8.2



주말 중미산에 예약을 해 둔 야영장이 있었지만, 태풍이 올라온다는 얘기에 아내가 야영가지 말라고 한다.


자다가도 아내 말을 듣지 않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지만, 

딸 아이가 일요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신청서 작성을 도와줘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캠핑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금요일 낮, 하늘은 이렇게 아름다웠고, 시정거리는 20km가 넘을 것 같았다.

폭풍전야의 고요가 이런 느낌일까? 유럽 여행 때 흔하게 봤던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공기.



토요일 오전, 일단 먹고 나서 구경하는 것이 덜 피곤하기도 하고

한참 성장 중인 아들의 식욕은 뭘 사줘도 잘 먹으니 흐뭇한 상태.


성북동 심우장 근처에 있는 유명하다는 금왕돈까스 집을 11:00시에 찾아갔다.

언덕에 자리 잡은 식당도 좋았지만, 동네가 사람 사는 것 같은 모습이라 서울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주인장이 점심 장사를 위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주문을 하기가 미안스러웠다.


하지만, 10분도 안돼서 많은 손님들이 몰려 들어왔다. 역시 유명한 집의 유명세....

맛도 좋았지만, 된장에 찍어 먹는 풋고추가 다른 돈가스 집과는 다른 점(?)

기름진 음식의 느끼함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특징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구경길을 나섰는데, 일부러 처음 와보는 성북구 쪽을 돌아가는 길인데

우크라이나 대사관, 핀란드, 노르웨이 등 각국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있는 대사관로를 따라 가는 길이 새로웠다.

깔끔한 동네 분위기와 얕으막한 건물, 그리고 언덕과 초록색 숲이 어우러져 잔잔한 즐거움을 주었다.


그러나, 초행길의 복병이 숨어 있었으니...

네비가 가르쳐 주는대로 가다가 아주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큰 길을 돌아 가는게 더 좋았는데 이미 후회해도 때는 늦은 일방통행 좁은 골목길.

조심조심 내려 가는데, 맞은 편에서 봉고차 한대가 기세좋게 올라 온다.


아뿔사!

심한 내리막 길이라 뒤로 뺄 수도 없고 최대한 오른쪽 길 가로 바짝 붙여 지나갈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맞은 편에서 올라오던 차는 갈 생각을 안하고 길을 막고 서 있다.

왜 그러지? 하고 차 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 밀었는데

대뜸, 60은 넘어 보이는 아저씨가 욕을 한다.


한글도 못읽느냐고 버럭 화를 내며 일방 통행길인데 들어왔다고 뒤로 나가란다.

네비게이션이나 도로 표지판을 아무리 봐도 이 길은 일방통행이 아닌데???

그 아저씨, 자기 성질을 못이겨 마구 날뛴다. 난 참, 제대로 대꾸도 못하고...


그때,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아저씨가 봉고차 운전자에게 쌍시옷을 날렸다.

"뭔 소리야, 누가 한글을 못읽는다고 그래. 여긴 일방통행이 아니라고. 도로 표지판이나 제대로 보고 다니지!" 하면서...

길 옆 빌라에 사는 영감님이 시끄러운 소리에 나오시더니

"저 아래 골목 끝이 일방통행이지, 이 길은 일방통행이 아니요!"라고 거드신다.


빌라에서 나오신 영감님이 봉고차 운전자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옆으로 길을 충분히 피해 주었으니, 올라가면 되겠구먼. 자 얼른 가시오. 저 젊은 양반 잘못은 전혀 없소"라고 하시며

봉고차 운전자를 보냈다.

봉고차 운전자는 자기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 나에게 욕을 하며 지나갔다.


'나참, 별 어이가 없군'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빌라에서 나온 영감님이 나에게 다가와 얘기해 준다.

"잘 참으셨소, 당신 잘못은 없으니 그냥 잊어버리고 아래로 얼른 내려 가시오"


영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골목을 빠져 나왔다.

역시, 사람은 40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더니, 인자하게 생긴 영감님의 목소리는 내 마음을 잘 다독거려 주었다.


넓은 정릉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정릉으로 들어 갔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 왕릉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정릉은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원래 4대문 안에 있던 무덤을 계모를 지독히 미워했던 태종이 이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금천을 넘어 홍살문을 지나면 신도를 따라 정(丁)자각이 있고, 비각과 제사를 모시던 사람들이 쉬는 작은 집이 있는 구조.

조선 왕릉은 어딜가 나 똑 같다.



왕실의 제수 진설 방법은 일반 양반가와 달랐던 모양이다.

미니어처처럼 귀엽고 깜찍한 제수 진설



돌아 나오면서 본 정릉.

살아서 두 아들이 살해되는 모습을 본 신덕왕후는 아마 왕비가 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

한 나라의 시작이 이렇게 골육상쟁의 피바람을 불렀으니, 그 끝이 아름답지 못하게 된 것도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두번째로 찾은 곳은 의릉.

장희빈의 아들로 유명한 경종임금의 그의 두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가 잠들어 있는 곳.

경종 임금은 4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에 노론 신하들에게 둘러쌓여 마음에도 없는 배다른 동생을 왕세제로 지명해야 했던 불행한 왕이었다.

겨우 4년 재위한 뒤 37살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죽었고, 그의 계비였던 선의왕후 어씨 역시 26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두 사람은 17년이나 차이가 나는 부부였다. 두 사람의 능은 위 아래로 봉분을 만든 독특한 쌍분이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의릉



그토록 권력을 갖고 싶어 했으나 왕비가 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은 경종의 어머니나, 왕이 되었으나 왕 노릇도 제대로 못해 본 경종.

그리고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은 경종의 계비 모두 불쌍한 인생처럼 느껴진다. 

정자각에서 홍살문 쪽으로 바라본 의릉의 모습은 도시에 초록 공간을 제공해주니 그래도 후손들에겐 덕을 베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태릉과 강릉.

 

왕을 맘대로 갈아치웠던 문정왕후 윤씨는 사후 중종의 곁에 묻히고자 했으나, 선릉이 여름에 자주 침수되는 탓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 따로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태릉).


태릉에는 조선왕릉전시관이 있어서 작은 박물관처럼 왕릉의 내부구조와 부장품을 알 수 있게 해 놓았다.




왕이 승하한 뒤에 릉을 조성하는 절차와 릉의 구조에 대해 상세한 설명자료가 있다.

아주 치밀하고 구조적으로 지혜가 돋보이는 건축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태릉 비각은 현재 보수 공사 중



왕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던 문정왕후의 태릉



태릉 정자각에 서서 바라본 파노라마



태릉에서 마지막으로 이웃한 강릉을 찾는데 난감하다.

강원도 강릉과 한글 발음이 같아서 휴대폰 지도 검색에서 쉽게 찾기가 힘들다.

아들녀석이 강릉 앞에는 주차장이 없다고 해서 휴대폰 지도검색에서 찾은 강릉을 찾아 내려갔다.

1.3km를 걸어 내려갔는데....



귀신 같은 빈 건물과 입구에 계고장이 붙어 있었다.

경내에서 우연히 관리인을 만나 반대쪽 위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살아 생전에 왕도 갈아치우는 권력을 휘둘렀던 태릉은 사격장, 결혼식장, 식당, 태릉선수촌에 잠식당해 세월이 무상한 것을 한탄할

처지가 되었으나 이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경내 정비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나 보다.


다시 태릉 입구로 돌아와 강릉을 향해 걸어갔다.

삼육대학교 입구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강릉은 명종임금과 인순왕후 심씨의 쌍분이다.

아들에게 왕통을 물려주고자 인종에게 가혹했던 윤비였지만 결국 아들은 손자를 낳지 못해 왕통은 덕흥대원군의 아들 선조에게 이어졌다.


태릉과 강릉 사이는 아주 가까운 거리지만

태릉 선수촌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왕릉 경내에서 직접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박정희 시절 피스톨 박이라는 별명을 갖고서 권력을 휘두르던 인간이 왕실의 땅을 이런 식으로 갉아 먹은 것이다.

독재자는 사라지고 역사는 유구한 것을 증명하듯, 독재자와 그 졸개들이 남긴 흔적들은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



강릉에서 소나무를 이식하는 공사를 하는 듯.



강릉의 비각


뙤약볕 아래 왕복 40분을 걸어 강릉을 다녀오는 동안 땀은 비오듯 쏟아졌다.

커다란 플라타나스 가로수가 그늘을 만들어 주었지만 올 여름 들어 가장 더운 날답게 준비해간 얼음냉수가 동이 났다.

이로서 준기는 서울 북동쪽에 있는 왕릉을 다 보았노라고 기뻐했다.

이렇게 다녀보니 서울이 참 넓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왕실이 4대문 안에 왕릉을 만들었다면 후손에게 더 많은 은혜를 베풀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숲이 모두 서울 도심에 있었다면 숨막히는 콘크리트 덩어리 서울이 요즘 같은 여름에 조금 덜 덥지 않았을까?


"그런데 준기야, 조선왕릉은 모두 똑같이 생겼잖니? 

금천교, 홍살문, 정자각, 비각, 수복방 모두 구조도 같고...그런 왕릉을 모두 돌아볼 의미가 있을까?"


"무슨 말씀을...겉모습은 같아도 묻혀 있는 사람은 다 다른데...묻혀 있는 사람들의 사연이 다 다르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