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저항권의 상징, 5.18 국립묘지
□ 기억의 인질
5.18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입니다.
앞 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꽃 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 노먼 소프(Norman Thorpe),
5.18항쟁 현장 취재 기자(당시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소속) -
최근 100여년 사이의 역사에서 우리는 자기 손으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 좌절을 여러 차례 겪었다.
나라를 되찾은 것도 우리의 결정권이 작용하지 못했다.
그런 좌절감과 부끄러움이 때로 내부 사람들에 대한 섭섭함을 넘어 적개심으로 표출되기도 하는 게 사회 현상이기도 한 모양입니다.
6.25사변을 겪은 세대는 동족 상잔이라는 전쟁의 기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후손에게 기억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욕심을 거칠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4.19 혁명을 겪은 세대 역시 경무대 앞에서 경찰 총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금을 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라고 만든 경찰이 독재자의 명령에 따라
국민에게 총질을 해 많은 사람을 죽인 것 역시 쉽게 헤어날 수 없는 아픈 기억일 겁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에게 “5.18 항쟁”은 이와 비슷한 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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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빚, 5.18 국립묘지
5.19일,
새벽에 비가 내렸다.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국립묘지에 들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9시쯤 비가 그쳤다.
비가 온 광주의 아침은 훨씬 고즈넉한 분위기.
어제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을 5.18 국립묘지를 찾았다.
기념일 무렵이라 그런지 비가 온 날씨에도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올 때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계속 흘러 나온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광주에서 교육 받을 때였던 6~7년 전에 한번 와보고 처음이다.
역사의 죄인들이 요즘 증인들이 다 살아 있는 역사를 왜곡하려고 날뛰는 것을 보니 아이들에게 여기를 꼭 보여주어야 할 것 같다.
심지어 5.18이 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면 안된다고 하니 기가 찰 일이다.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이즈에 비하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군부 반란세력들이 권장하던 건전가요 수준이다.
오월가 정도는 되어야 5.18항쟁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1983년 5월 학생회관에서 보았던 광주항쟁의 생생한 필름, 그것은 충격이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잔악무도한 반란군의 패악질을 보고 난 다음에 머리 속에서 광주는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다.
1987년 초선 의원 노무현을 전국적인 유명인으로 만든 광주청문회가 있었을 때, 모 신문사에서 이런 요지의 기사를 냈었다.
수천명이 죽었다는 피해자쪽 주장과 폭도를 진압하기 위해 자위권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총을 쏘았다는 신군부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네 살짜리, 여덟 살짜리 아이가 폭도일 리가 있는가?
그리고 160여명으로 밝혀진 사망자 가운데 상반신에 총을 맞아 죽은 사람과 대검에 찔려 죽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자위권 차원이라면 훈련된 공수부대가 어찌 하반신을 쏘지 않고 상반신을 겨냥해 쏠 수 있으며
백병전에서나 쓰는 대검으로 인한 사망자가 다수일 수가 있는가?
희생자의 사인은 신군부의 주장이 명백히 허위임을 밝히는 증거다.
4.19 혁명 희생자가 경찰에 의한 희생이었다면, 5.18항쟁의 희생자는 그보다 더한 공수특전단에 의한 희생이다.
아랫사람이 해서 모른다, 내가 하지 않아서 모른다 라는 그런 비겁한 변명을 하는 자들이 ‘군인’이라 주장하는 것이 가소롭다.
더구나 희생자 가족의 갈등을 부추기는 망월동 시립묘역(제3구역)과 5.18국립묘역으로 분리시킨 반란군 집단의 행동은 더욱 가증스러운 일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왕정에 대항해 시민들이 무장을 하고 저항한 혁명이었다면,
1980년 광주항쟁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시민이 무장을 하고 저항권을 행사한 항쟁이라는 사실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본다.
서구 민주주의는 바로 시민의 저항권으로 이룩된 체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5.18 국립묘지 전시관에는 5.18 항쟁의 상황을 자료를 통해 상세히 설명해 놓아서
여기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역사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5.18 항쟁 기념물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써 인류의 공동 유산이 되었다.
묘역, 유영봉안소, 전시관을 돌아보고 역사의 문을 빠져나와 5.18국립묘지 왼쪽 언덕 너머에 있는 망월동 시립묘지를 찾았다.
여기 제3구역은 1980년 5월 27일 밤에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을 진압한 반란군이 사망한 시민군의 시신을 쓰레기차에 싣고 와서
버리다시피 매장한 곳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5.18 국립묘지 쪽으로 옮겨갔지만 두 군데 모두 묘지를 가지고 있는 희생자들도 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열사들이 이 곳에 묻혀 있다.
동 시대에 비겁하게 강의실에 앉아 있던 나와 달리 이 분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 정도 나마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재호, 이한열, 이내창, 이철규, 그리고 강경대....
열사라는 호칭으로 쉽게 부르지만 그들의 치열했던 삶은 살아있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우리는 큰 죄를 지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그 뒤를 이은 1832년, 1840년, 1848년의 혁명, 1871년 파리 꼼뮨.
절대왕정의 폭압정치를 타도하고 민중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려고 몸부림 치던 시대. 그 시대에도 어리석은 자들이 많았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지지하고 그가 왕이 되는 것을 허용했던 사람들,
오직 보나파르트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황제로 선출된 루이 나폴레옹,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한 프랑스 민중은 우리에게 반면 교사이다.
우리는 이런 바보 같은 과정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기대했는데 어리석게도 그 수렁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절대왕정을 타도하려고 일어났던 민중들이 왕당파나 다름없는 수구들을 선택해 권력을 맡기는 어리석은 짓을 했고,
그것이 보수주의가 압도하는 프랑스 공화국을 만들고 말았다.
그나마 프랑스 보수주의자들은 혁명을 왜곡하지 않았다.
4.19 혁명으로 독재를 타도했음에도 박정희의 군사반란을 막지 못했고,
박정희의 사살로 쉽게 얻을 수 있었던 민주주의는 또 다시 군부 반란군에 의해 <서울의 봄>을 상실하고 5.18 항쟁의 비극을 맞고 말았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자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월이 지날수록 군사반란의 범죄는 더 뚜렷하게 역사에 남을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 기록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의 범죄는 더 명명백백해지기 때문이다.
이 참배를 끝으로 마음 속에 있던 짐을 조금 덜었다. 여기를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역사를 기억하고 전하리라 생각한다.
1798년 프랑스 혁명은 지금도 프랑스 정치인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권력이 부당하다고 느끼면 시민은 무장을 하고 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는 역사적 체험을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5.18 항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민의 무장저항 사례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솔직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자신의 범죄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을 호도하고 진실을 왜곡하려고 하는 기억 조작행위를 하는 것이다.
5.18 민주묘지(5.18 국립묘지) 정문
항쟁 당시 사망한 사람들을 모신 제1묘역에서 정문쪽을 바라본 모습
19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5·18 직전까지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을 주도하다가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동시에 보안사에서 재야 인사들을 체포하자 광주광역시를 빠져나가 여수로 도피했다. 1982년 4월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50일 간의 옥중 단식투쟁 끝에 사망했다 / 위키백과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이름도 남기지 못한 분들도 여러명 묻혀 있다.
최미애 님의 묘. 당시 신혼이었던 최미애 님은 퇴근하는 남편을 마중 나갔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당시 임신 8개월이었다고 한다. 1958년생, 겨우 23살에....
언론이 추구해야 할 것은 '진실'말고는 없다고 말했던 참 언론인 리영희 선생.
도청 사수에 참여했던 시민군, 윤상원. 이 사람의 사인은 무려 8가지였다고 했던가? 반란군들이 얼마나 잔악했는지 그의 시신이 보여주었다.
함께 묻힌 박기순 님은 윤상원 열사와 함께 들불야학을 했던 분이었는데,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늘 박기순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던
윤상원 열사와 영혼결혼을 하였으며, 부부의 자격으로 윤상원 열사의 묘가 합장되었다.
윤상원 열사는 도청 함락 전날 어린 학생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살아서 역사의 증인이 되라는 부탁과 함께...
유영 봉안소. 5.18 국립묘지 오른쪽에 있다. 희생자들의 사진이 빼곡하다.
당시 죽음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나이 어린 여학생도 있었고
행방 불명이 되어 끝내 찾지 못한 8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이런 사람을 상대로 총질을 해 댄 자들이 "사나이 한 목숨 무엇이 두려우랴!"는 군가를 뇌까리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5.18 묘지 왼쪽에 있는 5.18 기념관 내부
반란군의 도청 발포로 죽은 사람들의 시신에서 수습한 시계와 피묻은 태극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님을 위한 행진곡
당시 모습을 알 수 있는 영상자료를 시청하고 있는 사람들.
1980년. 5월 27일 밤
반란군들은 저항하는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탱크를 몰고 전남도청을 공격했다.
그날 밤, 죽어가는 시민군을 잊지 말아달라는 방송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메시지로 남았다.
반란에 성공한 자들이 자기를 끼리 주고 받은 무공훈장.
그들은 대한민국 이라는 국가를 조폭단체로 만들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그들이 나눠가진 훈장을 근거로 그들을 기소해 모두 법정에 세웠다.
이익에는 이리 떼처럼 달려 들었던 자들이 범죄가 드러나자 갑자기 어버버한 자들로 변신했다.
5.18 묘지 왼쪽 역사의 문을 나서면 망월동 묘역을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망월동 묘지 입구 표지석. 1980년 5월 30일
반란군들은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숨진 시민군들의 시신을 쓰레기차에 싣고와 이 곳에 함부로 묻었다.
훗날 5.18국립묘지로 이장하기 위해 무덤을 개토했을 때, 비닐에 둘둘 말린 채 드러난 시신도 있었다.
1980년대 5월의 대학가에는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딜갔지?"라고 반란군의 만행을 질타하는 <오월가>가 널리 퍼졌다.
반란군 수괴 전두환은 1982년 3월 10일 망월동 묘역 근처인 담양군 고서면 성산 마을에 묵으며 기념비를 세웠다. 이름하여 <민박기념비>
1989년 1월 13일 광주전남 민주동지회에서는 이 비석을 부수어 여기 제3묘역 입구에 묻었다.
오가는 모든 사람들의 흙발에 짓밟히는 반란군 수괴의 이름.
5.18 항쟁 당시 실종된 65명중 29명의 영정이 이 곳에 있다.
5.18 항쟁 33주년을 맞이하여 이 곳에도 기념행사와 추모행사가 있었다.
1986년 5월 3일 서울대학교에서 김세진 열사의 분신 자살 후 5월 26일 분신 자살한 이재호 열사의 묘
두 사람 모두 주변을 잊고 그저 공부만 했더라면 누구 못지 않게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서울대 재학생이었지만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
5.18 항쟁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는 원래 이곳에 묻혀 있다가 지금의 5.18 국립묘지로 옮겨 갔다.
19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끈 이한열 열사의 묘.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다 최루탄에 희생된 김주열 열사처럼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전두환에게서 항복을 받아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87년 6월 9일 6.10항쟁 하루전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한달 뒤 세상을 떠났다.
서울 시청에서 치른 그의 노제에는 무려 백만명의 시민이 참가해 서울 도심을 사람으로 가득 채웠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희생자의 묘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었던 1989년 거문도에서 의문사.
당시 중앙정보부의 공작 의혹이 강하게 제기 되었으나, 끝내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의문사로 남아 있다.
1989년 5월 3일 경찰에 쫒기던 중 의문사.
망월동 제3묘역 오른쪽. 1994년 부산 로터리 클럽에서 새운 영호남 <사랑과 우정의 기념비>
5.18 국립묘지 주변에 추모의 글이 펄럭이고 있다.
엄숙한 참배와 역사 공부가 끝나자 배가 고프다. 아침을 먹지 않았던 것.
인생사 삼세번이라고 아내가 ‘담양애꽃’에 가서 먹자고 한다.
점심 때는 설마 식재료가 떨어지진 않겠지?
이 불가사의한 음식점은 일요일 낮에도 무려 1시간을 대기해서야 밥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음식점 주인장은 전문경영인의 포스를 풍기는데다 어쩜 저리도 친절할 수 있는지?
너무 맛있는 남도의 정식을 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귀가 길에 올랐다.
<임을 위한 행진곡>, <님을 위한 행진곡> / 출처 위키백과
1981년 소설가 황석영과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음악인 김종률 등 광주 지역 노래패 15명이 공동으로 만든 노래극(뮤지컬) 《넋풀이 -빛의 결혼식》삽입곡. 이 노래극은 1980년 5월 27일 5·18 민주화운동 중 전라남도청을 사수하다가 계엄군에게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9년 노동현장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것.
곡은 김종률이 1981년 5월 광주에 있는 황석영의 자택에서 썼고, 가사는 시민사회 운동가 백기완이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1980년 12월에 서대문구치소 옥중에서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의 일부를 차용하여 황석영이 붙였다.
1982년 2월 윤상원과 박기순의 유해를 광주 망월동 공동묘지(현 국립 5·18 민주 묘지)에 합장하면서 영혼결혼식을 거행할 때 처음 공개됐는데, 이 노래는 이후 카세트 테이프 복사본, 악보 필사본 및 구전을 통해 민주화 및 노동운동 세력 사이에 이른바 '민중가요'로서 빠르게 유포되었고, 5·18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대표곡으로서 자리잡았다.
이 가사의 원작인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중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전략)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후략)”
저작권
가사의 원작자인 백기완은 1998년 "나는 이 노래에 대한 소유권도 저작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미 이 땅에서 새 날을 기원하는 모든 민중의 소유가 됐기 때문이다."라며 저작권 불행사 입장을 밝혔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매년 5·18 민주화운동 추모행사에서 유족과 시민들 사이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사실상 대표하는 노래로 제창되어 오다가, 1997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되어 정부 주관으로 첫 기념식을 열었을 때부터 2008년까지 정부주관 기념식 본 행사 말미에 기념곡으로서 제창.
이명박 정부 시기였던 2009년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공식 식순에서 제외되고 식전 행사로 밀렸으며, 2011년부터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폐지되고 합창단의 기념공연시 합창에 삽입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2013년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체할 별도의 5·18 민주화운동 공식 기념곡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5·18 관련 단체는 2010년부터 정부주관 기념식 참석을 거부하고 별도의 기념식을 여는 등 이에 반발하고 있다.
월드컵 응원가
2002년 월드컵 당시에도 널리 불렸던 곡 중의 하나이다. 붉은악마에서 발매한 2002년 월드컵 공식 응원가 CD에는 인디 밴드 버닝 헵번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수록되어 있다.
해외 소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의 민권운동가들에 의해 해외 각국에 소개되었고,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다 귀국한 이주노동자를 통해 해외에 유포되어 각국의 노동운동 현장에서 현지어로 번안되어 불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지어로 번안된 〈임을 위한 행진곡〉은 홍콩, 중국, 대만,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