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여행

광주 시내 돌아보기

연우아빠. 2013. 5. 30. 19:30

□ 광주일고에서 만나는 항일투쟁의 역사

 

5.18일 새벽

일찍 잠든 덕분인지 새벽에 눈을 떴다. 아침을 먹으려면 일찍 일어나 시내로 나가야 하는데 가족들은 평소 주말과 다름없이 늦잠을 잔다. 

9시쯤 숙소를 나와 시내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5.18 국립묘지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 같아 참배는 내일 하기로 하고 오늘은 광주 시내 쪽으로 가기로 했다. 

숙소를 나오니 5.18 행사 때문인지 사복 경찰과 정복 경찰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

 

오늘은 양동시장에서 정율성 선생 생가까지 이어진 구간을 돌아보는 일정. 

양동시장은 5.18 항쟁당시 시장상인들이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해 먹였던 곳이며 호남에서 제일 큰 전통시장이다. 


국립묘지에서 큰 행사가 있기 때문인지 시내는 아주 조용했다. 

양동시장을 찾아가는 길에 한참동안 점집이 이어진 길이 나타났다. 

암울한 세상을 겪으며 희망을 얻고자 한 사람들이 많았던 때문일까?

 

광주천 복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양동시장으로 들어갔다. 

오전이라서 그런지 시장은 조용했다. 

시장 구경을 하면서 두어가지 물건을 사고 아침 먹을 곳을 찾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식사를 했다는 식당을 발견했다. 


마침 그 분이 식사를 했다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쉬움을 많이 남기고 역사적 인물이 되어 버린 분이라 그 분이 남긴 흔적이 반가워 그 분이 앉은 자리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으며 전체 구간을 다 걷기에는 시간과 체력이 받쳐주지 못할 것 같아서 선이 아닌 점을 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가까운 곳에 광주일고가 있다. 아내가 주차 안내원에게 광주일고 가는 길을 묻길래, 내가 얼른 말을 잡아 챘다.

“일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길을 확인한 뒤 아내가 묻는다.

“일고는 무슨 얘기야?”

“응, 여기 사람들은 광주일고라 부르는 것보다 ‘일고’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워. 

호남 제일의 명문 광주서중, 광주고보를 이은 자부심이랄까, 

항일투쟁의 상징이기도 하고 선동렬의 모교이기도 하고 

유일하게 메이저리거를 3명이나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고..그걸 존중해 줘야지”

 

“와! 대단한 학교다” 아들이 한마디 거든다.

 

광주일고를 찾은 이유는 여기에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일투쟁에 대한 흔적을 찾으려는 것. 

일고 안에는 이 날의 투쟁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에서 광주로 다니는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중학 3학년생이던 후쿠다 슈조(福田修三)를 비롯한 3명이 광주여고보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학생을 희롱하는 일이 있었다. 

현장에서 이 모습을 본 사촌 동생 박준채가 후쿠다와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났고, 

한일 학생들의 집단 싸움으로 번졌다. 


일본 경찰, 차장, 신문사는 일방적으로 일본인 편을 들었고 

결국 전국적인 항일투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싸움에는 전국에서 194개 학교에 54,000여명의 학생이 참여하였다.

(자세한 전말은 나주문화원의 자료 참조 http://www.najuculture.or.kr/docu/html/menu200/sub02_6_2_1.asp)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차별’이었다. 

민족차별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이 끝끝내 광복을 위한 항쟁을 하게 만들었다. 

작은 시비가 전국적인 항일투쟁으로 번졌던 이유는 일제의 차별을 의식했던 송홍 선생님 같은 훌륭한 교사와 

우리 청소년들이 평소 ‘독서회’를 통해 민족의식을 다듬는 활동을 한 것이 바탕이 된 것이다.

 

경내에 세워 놓은 “광주학생의거기념탑”은 친일했던 부끄러운 인간들의 면죄부인지도 모르겠다. 

친일 했던 군상들은 11월 3일 학생의날 마다 일어나는 반독재 시위에 학생의 날을 국가기념일에서 제외하는 쪼잔한 보복을 가했다.

 

친일 했던 한 문인은 이 탑에 이런 가당치도 않은 문구를 새겼다.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가 진심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면 

친일했던 그 자신이 부끄러워서라도 이 기념탑에 자신이 글을 새기는 짓은 사양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호남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양동시장 입구. 5.18 행사가 있는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의외로 조용했다.


양동시장 안에 있는 국밥집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투쟁 당시 학생들을 가르쳤던 송홍 선생님

그의 자손들이 월북을 하는 바람에 역사에서 묻혀 버렸지만, 이분의 민족의식 교육이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기념비가 있는 입구 왼쪽에 있는 선생님의 흉상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초등학생 때 배운 이 문구는 감동을 주었지만, 이 글을 쓴 자가 친일 매국노였다는 사실을 알고 구역질이 났다.

글을 배운 자라면 어찌 자신의 행적이 부끄러워서라도 이런 기념물에 이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당시 동맹휴학에 참가한 학교들의 깃발


1959년 항쟁 30주년 기념일에 당시 동쟁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모여서 쓴 서명


학생독립운동 당시 전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놓은 전시관 내부



 

□ 중국 현대 음악의 거장, 정율성

 

광주일고를 나와 정율성 선생 생가를 찾아 갔다. 

정율성 거리 근처에 차를 대고 시원한 것을 먹으러 갔다. 

우연히 고든 어비슨 기념관을 발견했는데 협동조합 활동을 통해 피폐해진 한국 농촌을 부흥시키려고 노력한 캐나다계 미국인 선교사라고 한다.

기념관 안 레스토랑에서 시원한 것을 먹고 아픈 다리를 잠시 쉬었다.

 

광주시내 여행 구간의 마지막에 있는 정율성 거리. 

우리나라에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생가를 찾는 중국 관광객이 굉장히 많다고 한다.

 

1914년 광주 양림동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현대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거장이다. 

1933년 중국에 망명을 해 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에 몸을 바쳤다. 

1937년부터 항일가요들을 작곡하기 시작해 유격전가, 전투부녀가 등을 작곡하였으며, 

지금도 전체 중국인민들이 알고 있다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 연안송을 비롯한 36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지금도 중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로 칭송을 받고 있다. 

1976년 베이징에서 숨을 거둔 그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베이징 팔보산 혁명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가족사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버지는 대한제국이 망한 뒤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큰형인 정효룡은 3.1 항쟁에 가담했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항일투쟁을 위해 고국에 잠입해 비밀공작을 수행하다 1934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사하였으며,

둘째 형인 정인제는 국민혁명군 제24군 참모로 복무하다 중국 무한 전투에서 전사했고, 

셋째 형인 정의은 역시 조선의용단 군정학원에서 일했다고 한다.

 

해방 뒤 그는 북한을 위해 조선인민군행진곡(지금의 조선인민군가)을 지었는데 

이것이 남북 이념대립으로 인해 항일투쟁의 업적이 묻히게 되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에서 연주한 곡이 바로 이 조선인민군가라고 한다.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문화혁명 와중에 반당분자, 간첩으로 투옥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는데 

모택동이 죽은 1976년 사면 복권되었으나 그해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무덤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중국 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를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설했다.”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하지만 열렬하게 살다간 한 인간의 역사에 표현할 수 없는 처연한 감상이 묻어나온다.

정율성 거리에는 그의 대표작품 6개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는데, 그가 작곡한 노래는 경쾌한 느낌을 준다. 

암울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힘차게 전진하려는 그의 의지가 배어 있는 듯하다.



광주 양림동에 있는 정율성 선생 생가. 자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으로 골목 끝에 있다.


생가 근처에 있는 정율성거리. 그에 일생에 대한 안내판


그가 작곡한 360여개 곡 가운데 6개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장치.


정율성 거리 끝에 있는 정율성 동상.


그리고 바닥에 있는 물고기 그림. 누가 그렸지?



 

□ 2천년전의 세계, 광주 신창동 유적

 

1992년 광주시내를 관통하는 영산강변에서 대단한 유적을 발굴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광주 신창동 유적,

이 유적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단직물, 현악기, 벼농사 유적, 재배식물의 씨앗, 농사도구, 칠기를 비롯한 유적 유물은 물론 

멀리 중국과 일본과 교역한 흔적들이 드러났다. 

이 유물은 보러 국립광주박물관에 들렀다. 

시멘트로 지은 기와건물이 눈에 거슬렸지만 볼만한 유물이 많은 박물관이었다.

 

1800년전 토기에 새겨진 서역인의 얼굴, 그리고 나주 영산강 일대에 넓게 퍼진 불꽃 장식의 금동관과

이 지역을 대표하던 조선 지식인들의 계보와 활동내역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를 주었다.

 

아침에 고기국밥을 먹어서 그런지 점심 생각이 별로 없는데다 날씨도 더워서 광주에서 유명한 팥빙수를 먹으로 갔다. 

장억떡집(예다손떡)이라는 가게인데 떡집으로 빌딩을 세운 집이다. 

1층에 떡을 넣은 팥빙수를 파는데 그림처럼 예쁘고 맛있는 떡과 함께 팥빙수를 시켜 남도의 더위를 식혔다.



국립광주박물관


1992년부터 발굴하기 시작한 2천년전 유적, 광주 신창동에서 출토된 유물들


3세기 경, 서역인의 모습이 완연한 돌에 새긴 얼굴


달처럼 아름다운 달항아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연못. 광주박물관 본관 올라가는 길에 길게 물길과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 문무를 겸비한 선비, 김덕령

 

이럭저럭 5시가 다 되가는 시간.

광주가면 꼭 가봐야 한다고 준기가 노래 부르던 충장사를 향해 달렸다. 

임진왜란 당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장 가운데 호남을 대표하는 이가 있다면 충장 김덕령을 꼽을 수 있다. 

지금 광주의 중심가인 충장로는 이 분의 호를 딴 것이다. 

무등산 고개를 넘고 계곡을 달려 충장사에 도착한 시간은 5시 20분쯤. 6시에는 문을 닫는다고 한다. 

마음이 급해진 준기가 달려간다.

 

선조 즉위년에 태어난 충장공은 담양에서 의병 5천을 모집했는데 

분조를 이끌며 전주에 내려와 있던 세자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의 군호를 받았다. 

익호장군이라는 군호 때문인지 그의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선조 28년에는 고성에 상륙하는 왜군을 격퇴해 선조임금에게 충용군의 군호를 받았고 

이 충무공, 곽재우 등과 함께 협력 작전으로 남해안을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선조 29년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였으나 이몽학과 내통한 충청도 순찰사의 모함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다 숨을 거두었다.

 

숨진 지 65년만에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 되었고, 

역대 왕들이 그에게 벼슬을 추존하다가 정조 12년(1788년) 사당을 건립하여 배향하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강력한 외적이 침략을 당하고,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했던 왕과 달리 사대부들과 백성들이 일어나 나라를 지킨 때문인지 

스스로 정통성에 자신이 없었던 임금 때문인지 선조임금은 참 많은 선비와 관리들을 죽인 못난 임금이었다. 

김덕령은 그런 시대였기에 33살의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의 삼족은 큰 타격을 입어 본관을 바꾸고 신분을 속여 후손을 이어갔다고 한다.

 

공자와 맹자는 인, 의, 예, 지, 신을 주저하거나 왜곡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그의 가르침을 본받는다는 조선의 위정자는 결코 그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왜 솔직하지 못했을까? 

솔직했더라면 더 멋진 왕, 더 멋진 나라가 되었을 것을...

겉모습만 어른이지 아이들만도 못한 정신적 미성숙이 몹시 아쉬운 대목이다.

 

6시까지라던 관람시간은 5시 45분이 되자 문을 닫아버렸다. 

전시관을 보지 못했는데....

 

다음에 다시 오면 멋진 무등산을 한번 올라보기로 하고 어제 못 먹은 ‘담양애꽃’ 식당을 찾아 갔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었을뿐인데 오늘도 저녁식사 손님을 더 이상 받지 못한다는 안내에 허탈했다. 

광주에 사는 입사 동기에게 전화를 해서 예전에 그 친구과 같이 갔던 퓨전 한정식 집(들풀)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일 다시 도전하리라! 아내는 얼마나 대단한 음식인지 꼭 맛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무등산 안쪽에 있는 충장사


선조 임금에게서 받은 군호. 충용군을 딴 충용문

충장공을 모신 사당


충장사 뒷편 언덕에 충장공이 신원이 된 뒤 그의 부인과 함께 묻힌 부부합장묘.

사후 65년만에 신원이 된 그를 선영으로 모시기 위해 무덤을 팠을 때 그의 시신은 썩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