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전북 서북부(1)
전북 서북부 지역 여행
기간 : 2013.2.28.~3.3(3박4일)
여행지역 : 전주, 익산, 군산
□ 전주 여행(2월28일)
오랜만에 본사로 복귀해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인생사 일장일단 양면이 있듯이 예상했던대로
많은 업무량으로 주중에 가족 얼굴을 보기는 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달력을 넘기다가 3월초에 3일 연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일단 멀리 여행가자는 생각을 아이들에게 전했다.
연우는 습관적으로 안간다고 하고 준기는 신이 나서 어디로 갈 거냐고 물어보고,
아내는 휴양림 말고 다른 숙소를 잡아서 가 보자고 한다.
전주, 익산, 군산을 돌아보는 것으로 일단 방향을 잡고,
아내가 원하는 전주한옥마을에서 1박을 해 보려고 인터넷을 뒤졌으나 가격이 매우 비쌌다.
담합을 한 듯이 2인 기준 8만원~10만원 정도에 1인 추가시 1만원 구조.
하긴, 한옥은 방이 작아서 2명 정도가 적당하겠지만,
가족여행 할 숙소로는 부담스러웠다.
역시나 우리는 휴양림을 찾게 되었고, 희리산 휴양림을 아주 쉽게 예약을 했다.
아무래도 개학을 앞둔 때라 학생이 있는 가족들은 여행을 다닐 때가 아니지.
숙소만 잡아두고 여행계획은 전혀 세우지 않았다.
준기만 혼자 열심히 지도와 인터넷을 뒤져서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다.
밀린 업무가 산더미 같은 때였지만 연휴를 앞두고 휴가를 냈다.
늘 출발 시간이 늦은 우리가족이 3월1일에 출발했다가는 경기도를 벗어나기 전에
인내심의 한계를 보게 될 것 같아서 황금 같은 하루 휴가를 쓰기로 했다.
□ 가족을 위해 꽃을 사세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문득 20년전 천주교에 입문하던 때 교리문답 과정에서 배운 시가 생각난다.
“우리는 40년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며, 40년 뒤에는 어디에 있을지 알지 못한다”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요즘은 80년으로 바꿔야 할 듯)
유럽 중세 때부터 전해오는 시라고 하는데
어디에서 와서 언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사람의 삶을 생각하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행복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
늦은 출발이었지만
막히지 않은 덕분에 2시간반 정도 걸려 전주한옥마을 공영주차장에 도착했다.
나지막한 기와집,
고래등처럼 크지 않아 위압적이지 않고 높은 건물이 없어 시야가 환한 그런 마을.
주변에 “나 잘났소이다”라고 자랑하지 않고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마을 모습.
유럽 여행을 하고 난 다음에는 다른 나라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어떤 모습이 기억에 남는 풍경일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전주 한옥마을은 분명 이방인에게 독특한 느낌을 줄 것 같다.
지도를 들고 일단 점심을 먹으러 갔다.
준기가 찾아 놓은 첫 번째 맛있는 집은 성미당.
주차장에서 한옥마을 북쪽에 난 길을 따라 서쪽으로 800m쯤 걸어가면 있는 집.
40년 동안 맛있는 비빈밥으로 길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집.
골목을 따라 걸어가는 동안 동서양의 오래된 역사도시들이 갖는 공통점이 보인다.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골목과 조용하고 군더더기 없는 모습.
□ 전주의 비빈밥
[골목에서 본 전주 한옥마을 풍경]
왼쪽가운데...대기업 때문에 사라진 우리 양조장이 저런 모습으로
도시마다 남아 있었더라면 독일의 옥토버 페스트 같은 문화가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왼쪽아래 한지공예품을 보면서 루체른이나 베네치아에서 보았던 지역 특산품이 생각났다.
오른쪽 그림은 이 마을을 가꾸기 위한 주민자치활동이 있음을 보여준다. 오른쪽에 찍힌 젊은이들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런던을 여행하며 길가에 있던 피아노를 쳤었다는 짧은이야기님의 여행기가 생각난다
차를 타고 다닐 때 보이지 않던 여러 모습이 보인다.
가게 유리문에 써 놓은 글은 잔잔한 여유를 갖게 하고
술바람 식구들이 좋아할 양조장도 눈에 들어온다.
한지 공예품, 예술거리를 가꾸는 지역주민들의 활동 등등.
왱이 콩나물 국밥집 앞을 지나면서 이 골목을 여러번 왔었다는 것을 알겠는데
그때는 왜 이런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10분쯤 걸어서 드디어 성미당 앞에 도착했다.
<식객>에서 비빈밥이냐 비빌밥이냐를 두고 치열하게 싸우던 주인공이 생각난다.
성미당은 전주 지역의 대표적인 맛 가운데 하나인 비빈밥으로 유명한 집.
밥이 나오는 동안 가게를 찬찬히 둘러본다.
어린이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주인과 직원들, 그리고 예쁜 꽃무늬가 있는 식탁.
세월이 묻어있는 짙은 나무 색깔이 주는 편안함
늦은 점심이었지만 배고픔으로 재촉하거나 서두르고 싶지 않은 집이다.
잠시 후 먼저 아름다운 반찬 12가지와 오방색 채소를 덮은 비빈밥이 나왔다.
단무지처럼 보이는 샛노란 창포묵, 그리고 달걀 흰자를 두부처럼 만든 반찬 모양이 독특하다.
밥과 반찬 모두 미각을 속이는 짠맛, 단맛, 매운맛이 없고 군침이 돌게 만드는
음식의 잔잔한 맛이 탁월하다.
훌륭한 음식을 음미하며 점심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한옥마을을 둘러보러 나섰다.
동서 남북 양 축이 800m가 안되는 이 곳에서 전주의 모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40여년간 전주 비빈밥의 맛을 가꿔온 성미당 비빔밥집. 식탁에 깔린 고운 한지와 그림, 오방색 모양도 맛도 훌륭한 먹기 아까운 밥과 반찬]
□ 명품 과자 풍년제과
조선시대 관리들이 묵던 전주객사(풍패지관)과,
현대적인 시장이 들어서 있는 객사길을 돌아
60여년 동안 맛있는 양과자를 만들어온 풍년제과점에 들렀다.
[전주객사. 풍패지관 현판...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전주에서 한고조의 고향 이름을 딴 객사이다]
[객사 옆에는 시장 골목길이 있는데 왼쪽 작은 차에서 파는 군것질거리도 먹음직하다]
오래전 동네마다 도시마다 유명한 양과자점과 제과점이 있었다.
청소년 때 미팅장소로 사랑받았던 그런 집들은
세상을 모두 돈으로만 보는 사람들 때문에 사라지고 있다.
풍년제과도 그렇게 사라질 뻔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손으로 만든
초코파이의 명성 덕분에 살아남았고 지금은 번성하고 있다.
제과점 안에는 평일 낮인데도 손님이 가득 찼고,
그 손님들이 담아갈 종이상자 접는 사람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가게 유리벽에는 시간 불문하고 종이상자 접을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방이 붙어 있다.
이 가게가 얼마나 바쁜지 짐작이 간다.
아이들은 파리 라데팡스에서 크로와상과 바케트를 맛있게 만들던 제과점을 이야기한다.
풍년제과도 그런 제과점처럼 오래 오래 대를 이어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공장에서 저렴하게 찍어내는 식어버린 ‘제품’이 아니라
사람의 손과 정성이 들어가서 따뜻한 진짜 빵과 과자를 두고두고 맛보고 싶다.
인공적인 단맛이나 자극이 강한 맛이 아니라 씹을수록 고소한 은은한 맛!
[재벌 상속녀들의 놀이터가 되버린 제과점들이 대부분이지만 50년 넘게 맛으로 사랑받는 제과점이 남아있다.
예전에 이런 제과점은 청춘남녀들의 미팅장소였는데 지금은 관광객이 바글바글하다.]
□ 풍남문
과자와 빵을 사들고 풍남문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길이 직선이라 풍남문이 빤히 보인다.
전주성의 4대문 가운데 남쪽문인 이 문만 남았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처음 만들었고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것을 영조 때 전라감사 홍락인이
다시 세우면서 이름을 풍패의 남쪽이란 뜻으로 풍남문이라 붙였다고 한다.
풍패는 한고조의 고향으로 유학을 숭상하던 조선 선비들이 이상향처럼
생각했던 고장으로 조선 태조의 발상지인 전주를 풍패의 남쪽이라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풍남문에는 “호남제일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한때는 전주성 사람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문이었지만
지금은 도시에 갇혀있는 섬으로 남았다.
[호남제일성 전주의 남쪽 관문이었던 풍남문. 지금은 도시 한 가운데 섬처럼 갇혀 있다]
독특한 건물 디자인과 특이한 거리 조형물....천지창조를 흉내 내는 준기
□ 전동성당, 신앙과 외세의 양면성
풍남문 조금 떨어진 곳에 독특한 모양을 한 성당이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호남 지역 최초의 성당으로
1908년에 착공해 1931년에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이 성당은 제국주의 침략시대의 아픔이 베어 있다.
이 장소는 원래 우리나라에서 천주교인으로는 처음으로 순교한
윤지충의 처형 장소로 알려져 있다.
윤지충은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부모의 위패를 불살라
전통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을 거부한 사람이었다.
이 성당은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기전을 넘보고 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앞에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있을만큼
외세의 침략으로 조선은 무력하게 망해가는 중이었다.
성당을 처음 지을 때 사용한 석재 가운데는
일본침략자들이 전주성을 헐어버렸을 때 나온 자재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조선의 정신과 물리력이 외세에 굴복하는 상징적인 건물인 셈이다.
수도인 한양에서는 왕궁 앞에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대사관이 왕궁을 넘보고 있었으니
지방에서야 말해 무엇하겠나 싶다.
성당 안에 들어갔을 때 성수를 묻혀 성호를 그었다.
아는 자의 복잡한 심정이랄까, 무심한 관광객들은 기념사진을 찍으며 스쳐간다.
해가 조금 넘어간 시간이지만 이날은 무척 따뜻했다.
이제 한옥마을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경기전을 보러 간다.
전동성당. 아담하고 아름답고 소박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주변에 새로 지은 순교자기념관도 본당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천주교 신자 입장에선 반갑고 한국인 입장에서는 왕실의 발상지를 치고 들어온 침략성이 엿보여 씁쓸한 느낌도 받는다.
□ 조선왕실의 정신적 고향
경기전(慶基殿).
나라를 연 태조의 조상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므로
경사스러운 기반을 닦은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경기전에는 태조의 어진과 함께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4대 사고 가운데 하나인 전주사고가 있던 곳이다.
터럭하나도 다르면 초상화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시대인만큼 역대 왕의 어진이 모두 남아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 전하는 것은 태조, 영조, 철종의 어진이 있는데
그나마 태조 어진은 1871년 고종 황제 때 새로 모사하여 그린 것이고
영조와 철종의 어진 역시 불에 그을려 일부만 남은 상태라고 한다.
임진왜란과 6.25사변 등의 전란과 화재로 불타 없어진 것이라고 한다.
조선은 고려왕조를 본받아 역대왕의 실록을 편찬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는 실록을 4부씩 인쇄하여 4군데 나누어 보관하였다.
한양 왕궁 안에 춘추관, 고려 때부터 사고였던 충주,
그리고 성주와 왕실의 발상지인 전주 이렇게 네군데에 나누어 보관함으로써
전란이나 재해에 대비했던 것이다.
호남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권율의 활약에 힘입어 왜적이 발을 붙이지 못한 덕분에
전주사고는 무사했지만 나머지 사고는 모두 불타버렸다.
전주 지역 선비인 안의, 손홍록 등이 실록을 이고 지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보관했던 덕분에 왜란이 끝난 뒤에 이를 바탕으로 다시 복간할 수 있었고
왜란 이후에는 다섯군데에 나누어 보관하게 되었다.
왕조실록 편찬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실록을 완성한 뒤
기초 자료가 되었던 사료들을 세초식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물에 씻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넓고 넓은 경기전을 나와
조선 태조가 처음으로 왕이 될 야심을 드러낸 곳으로 알려진 오목대를 향해 갔다.
전주 한옥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오목대가 서 있다.
조선 왕실이 자신들의 발상지로 신성하게 여겼던 경기전.
들어가는 문(왼쪽 위), 태조어진(오른쪽 위), 경기전에서 보이는 전동성당(왼쪽 아래),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오른쪽 아래).
□ 왕을 꿈꾼 사람이 만든 이야기, 오목대와 이목대
고려의 해안을 전방위로 습격하며 맹위를 떨쳤던 왜구는
1380년 금강하구인 진포에 5백여척을 끌고 대규모로 침략을 했다.
조정에서는 최무선을 파견해 세계최초로 함포를 사용한 수전을 벌여
적선 5백여척을 파괴하였다.
내륙에 있던 왜구들은 황산(지금의 운봉, 남원 일대)에 집결해 고려를 위협했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파견해 토벌하도록 했는데
아기바투로 알려진 용맹한 왜구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성계가 지휘한 고려군은 이들을 섬멸함으로써
지긋지긋한 왜구의 침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황산대첩을 끝내고 개경으로 돌아가던 이성계는
전주의 오목대 자리에서 왕이 될 야심을 처음으로 드러냈다고 한다.
지역에 거주하는 일가친지들을 불러 잔치를 연 이성계는
술을 핑계로 이 자리에서 대풍가를 불렀던 것이다.
大風起兮雲飛揚 큰바람이 일자 구름이 높이 오르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엄을 해내에 더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네
安得猛士兮守四方 용맹한 사람을 얻어 안정을 얻고 나라를 지켰노라
그 자리에 있었던 정몽주는 깜짝 놀랐다.
대풍가는 한고조가 항우를 쓰러뜨리고 천하의 패권을 잡은 뒤
고향에 돌아와 잔치를 열었을 때 읊었다는 시였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야심을 확인한 정몽주는 오목대 근처에 있는 남고 산성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담은 석벽제영(石壁題詠)이란 시를 읊었다.
석벽제영은 남고산성 만경대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千刃崗頭石徑橫 돌길을 가로질러 천길 높은 산머리에 오르니
登臨使我不勝情 내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靑山隱約扶餘國 청산에 깊이 잠긴 부여국의 맹세는
黃葉賓紛百濟城 누런 낙엽이 되어 백제성에 날리네
九月高風愁客子 9월 바람은 나그네의 시름을 높이고
百年豪氣誤書生 백년의 호탕한 기상은 서생을 그르쳤네
天涯日沒浮雲合 하늘가에 지는 해는 뜬구름과 만나는데
矯首無由望玉京 하염없이 고개 들어 개경을 바라보네
정몽주는 이성계의 호탕함에 매료되어 그를 도왔지만 결국 나라를 범하려는
자를 도왔다는 자책에 괴로워했고 고려를 위해 죽기로 결심한 듯 하다.
지금 오목대는 조선말 고종임금 때 표지를 세웠다고 한다.
오목대에서 육교를 건너면 이성계의 조상인 이안사가 살았던 곳이라고 전하는 이목대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전주가 이성계의 본향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이안사가 수백가구를 이끌고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겼다는 주장은
당시에 몽골이 40여년간 대규모 침략만 7차례를 자행했던 시대였고
모든 백성들에게 육지를 버리고 섬으로 남쪽으로 도피하라는 명령이 내렸던 시대이다.
또한 삼척에서 다시 원산으로 백성을 이끌고 도피했다고 하는데
도망자인 이안사에게 고려조정에서 벼슬을 주고 몽골 침략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과
몽골군이 회유한다고 바로 항복했다는 주장도 의문이다.
몽골에 항복하자마자 이안사는 바로 천호장에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성계의 조상은 원래 여진과 관련이 있는 원산 일대에 살던 사람으로
몽골의 침략 때 일찍 항복해 천호장과 만호장이 되었던 듯 하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뒤 몽골은 72명의 다루가치를 남겨 두었다고 하는데
이안사는 이 72명의 다루가치 가운데 한명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몽골이 동북면의 세력을 잃게 되었을 때
고려에 협력해 쌍성총관부를 되찾는데 공을 세웠고
중앙무대에 등장하면서 고려에 연계고리를 만들 필요성이 커지지 않았나 싶다.
고려 태조의 선대 족보나 조선 태조의 선대 족보는 후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리고 약간은 모자란 듯한 전주 여행을 끝낼 시간이 되었다.
이목대에서 내려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전주소리문화관을 우연히 발견했다.
명창들의 유물을 모아서 전시하는 아담한 기와집들이 담백한 멋을 선사해준다.
그러고 보니 한옥마을 외곽선만 따라서 한바퀴를 돌았다.
다음을 기약하며 삼백집의 맛있는 콩나물국밥을 맛보러 길을 떠났다.
오목대(왼쪽 위), 이성계가 왕이 될 야심을 드러냈던 시 <대풍가>가 오목대에 걸려 있다(오른쪽 위)
이목대 가는 길(왼쪽 아래), 조선왕실의 발상지 이안사의 집이 있었던 이목대(오른쪽 아래)
□ 전주의 맛
대기업이 아무리 값싼 제품으로 고급 제품으로 덤벼도 철옹성처럼 무너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 남도 여행에서 맛 본 역사 깊은 맛집들이 오래 오래 번성하기를 바랍니다. ^^
성미당
전화 063-287-8800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3가 31-2
위치 전주 한옥마을 북서쪽 귀퉁이에 있는 40년 역사를 자랑하는 비빈밥 전문집.
주방에서 미리 밥을 비벼서 놋그릇에 담고 그 위에 화려한 오방색 나물로 치장한 비빈밥이 일품
단맛, 짠맛, 매운맛 등 자극적인 맛이 전혀 없는 맛있는 집
전용 주차장이 있으며 분점도 있음
홈페이지 : http://www.sungmidang.com
삼백집
전화 063-284-2227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454-1
위치 전주 한옥마을 북서쪽 귀퉁이에서 충경로를 따라 600m쯤 서쪽에 있음
원래 콩나물국밥 300그릇만 판다고 하여 삼백집으로 알려졌으나
요즘은 24시간 영업을 하고 있으며 법인을 설립하여 체인점도 내고 있음
반찬은 조금 짜지만 국밥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절묘한 맛을 내는 집.
전용 주차장 있음
홈페이지 http://www.300zip.com/
풍년제과(PNB)
전화 063-285-6666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경원동1가 40-5
위치 전주 한옥마을 북서쪽 귀퉁이 충경로 사거리
수제 초코파이로 유명한 제과점.
창업 이후 우여곡절도 참 많았다고 하는데 사업 잘 되기를 바랍니다.
28일날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가게 안에 바글바글 하더군요.
산처럼 쌓여있는 종이상자와 시간 불문하고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을 구한다는 안내문을 보니
얼마나 장사가 잘 되는지 짐작이 갑니다.
손에 잡히는 모든 과자와 빵이 맛있었고,
인공적이거나 자극적인 맛이 없는 은은한 맛이 특징인데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아서 살찌는게 고민인 사람들에겐 좀 고역. ^^
홈페이지 http://www.pnbakery.co.kr/
경기전 앞, 걷기 좋은 길...주말에는 차없는 거리로 운영한다고 함. 높은 건물이 없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거리를 걷다 보면 심심찮게 보이는 공예품 가게
한옥숙박체험과 공예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도처에 있다. 이런 집에서 살면 성정이 부드러워질 듯...
오목대 올라가는 길에 내려다 본 한옥마을 풍경
동고산성 근처에 있는 절인가? 저 쪽으로 정몽주가 이성계의 야심을 알고 분노했던 남고산성도 있는데 다음을 기약하며...
전주다운 방송국. 전주국악방송
방송국 옆에는 전주소리문화관이 있다. 명인 명창들의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
반나절이 걸려 한바퀴를 돌았지만 아직 더 봐야 할 것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