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동쪽해안 유적 (2)
강화도 동쪽해안 유적 (2) / 2012. 11.3(토)
해안에 있는 진을 구경하는 동안 점심시간이 되었다.
맛집을 탐방하는 재미도 있지만, 지역 토착 음식을 먹어보자는 아들의 제안에 따라
광성진을 나와 읍내에 있는 중앙시장으로 갔다.
아무래도 전통 있는 재래시장 쪽이 맛있고 값도 싼 음식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차를 길가 주차장에 대고 중앙시장 안으로 걸어 갔다.
골목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갑자기 큰 길을 만났는데 강화읍 사무소 앞이었다.
최근에 손을 댄 모습에 잘못 왔구나 싶은 생각이 얼핏 들었다.
더 헤매는 것 보다 가까운 음식점에 가 보자 라는 생각으로 제일 앞에 보이는 집에 들어갔다.
집이 새로 지은 2층 양옥집이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 우리옥 032-934-2427 >이라는 상호를 달고 있는 역사가 있는 밥집이었다.
1953년부터 장사를 한 이 집에는 그동안 유명한 사람들도 제법 다녀간 흔적이 있다.
차려낸 백반(1인분 5천원)은 조개젓을 제외하고는 자극적인 반찬이 전혀 없었고,
간결한 맛이 근래 보기 드문 집이었다.
뜻하지 않게 정말 좋은 집을 찾은 셈.
주인 할머니 말씀으로는 원래 집 절반이 도로공사에 편입되는 바람에
좁은 터에 그대로 2층을 올려 집을 지었다고 한다.
3대가 모두 만족한 입맛을 다시며 추가로 밥을 더 주문해서 먹었다.
밥을 먹었으니 이제 다시 길을 나서야지?
점심을 먹은 곳에서 동쪽으로 300m쯤 올라가니 큰 주자창이 나온다.
그 곳에 차를 대고 주변을 돌아 보았다.
조선 철종 임금이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초가는 <용흥궁>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단 기와집이 되었다.
그래봐야 작은 기와집이지만...
몇년 전에 왔을 때는 넓은 주차장이 있는 줄도 모르고 옹색하게 골목에 차를 대고 구경을 햇었는데
이제는 대형 버스들도 심심찮게 들어와 단체 관람객들을 내려 놓는다.
철종이 살던 집은 원래 이 자리에 있었단다.
조선이 힘을 잃으니 왕의 잠저 옆에 영국왕을 주교로 하는 성공회 성당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좋은 자리는 계속 좋은 자리인 모양이다.
용흥궁 뒷문으로 나서면 성공회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성공회 성당 아래쪽으로 내려와 고려궁터를 찾아 가는 길에 비각을 하나 만났다.
누군가 했더니 입으로만 나라를 지키던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이다.
병자호란을 자초했던 주전파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은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는 병자호란 때 세자빈, 봉림대군 등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했는데
강화도가 함락 될 때, 화약에 불을 붙이고 남문에서 폭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죽음에 대해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던 모양이다.
죽은지 10개월 뒤에 그의 아들이 세간에 논란이 되고 있는 김상용 사고사 설에 대해 조사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공식적으로는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느니 분사하겠다고 하여 폭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항간에는 그가 하인에게 자기 옷을 대신 입히고 숨어 있다가 담배를 피우려다가 불을 잘 못 다뤄 화약에 불이 붙어 폭사한 것이라는
소문이 떠 돌아 다녔던 모양이다.
어찌됐건, 아들은 간단하게 정리한다.
"명나라에 사대하고 오랑캐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면,
적에게 폭탄을 던져서 죽던지, 적에게 폭탄을 안고 돌진하다 죽든지 해야지
왜 멀쩡한 폭탄을 안고 성문 위에서 죽어? 그게 전쟁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할 짓인가?"
용흥궁 뒤쪽, 100m 쯤 올라가면 고려궁터가 나온다.
고려궁터 오른쪽 편에는 옛날 강화부 동헌이 있다.
왼쪽에는 정조 때 설치한 외규장각이 있었다.
1866년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군대는 여기에 보관된 각종 서적과 은괴 19상자를 훔치고 건물을 불태웠다.
이 사건은 프랑스가 적어도 한국에 대해서만은 "문화강국" 소리를 하지 못할 사건이다.
그들이 남긴 기록에는 강화도를 약탈할 때, 웬만한 집에는 모두 많은 서적을 보관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훔쳐간 책 가운데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을 비롯해
조선의 서책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사실은 2011년 프랑스에서 작고한 박병선 박사가 발견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최근에 대여 형식으로 이 땅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를 기념하기 위해 다시 그 자리에 건물을 복원했다.
내부에는 화성으로 행차하는 정조임금의 반차도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은 조형물이 있다.
외규장각 언던 뒷편은 고려 왕궁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그 때 궁궐이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 있다.
고려 때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최충헌과 그의 후손은 4대 60여년간 고려왕실과 백성을 농락했다.
몽골의 1차 침략을 받은 고려는 고종 19년(1232년)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주도하에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를 단행했다.
이후 몽골은 40여년간 고려를 6차례 침략했는데 육지의 백성들에게 섬으로 피난하라는 말만 남기고 왕실과 귀족만 개경으로 달아난 것이다.
육지에 남은 백성들은 노비에 이르기까지 몽골군과 싸웠지만
강도로 옮긴 최씨 정권은 외성과 중성을 쌓아 방비를 하는 한편,
간척지를 만들어 농토를 넓히고, 정권 유지를 위해 삼별초를 조직했다.
이렇게 안정을 유지한 뒤 그들은 육지의 백성들이 죽건말건 안전한 강화도에서 40여년간 향락을 누렸다고 한다.
최씨 무신 정권의 방패막이였던 삼별초는 원종이 쿠빌라이와 화친을 한 뒤에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자
죽을 것이 두려워 반기를 들고 승화후 왕온을 임금으로 삼고 진도, 탐라로 옮겨가며 몽골과 고려 조정에 저항했다.
고려궁성을 나와 약간 남쪽에 있는 갑곶진을 찾았다.
갑곶진에도 옛날 대포가 전시되어 있는데 구경이 100mm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이상한 것은 임진왜란 때 <비격진천뢰>라는 폭탄이 있었는데 어째서 30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포환을 날리는 대포만 가지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된다. 이양선과 전투에서 조선의 화력이 절대 열세였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양선은 폭발하는 포탄을 사용한 반면
조선의 대포는 여전히 포환을 멀리 날리는 대포였을 뿐이라는 점이다.
갑곶진은 탱자나무의 북한계선이다.
이 갑곶진은 조선 말기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참수당한 곳이기도 하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들 녀석은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로 연미정(燕尾亭)을 가봐야 한단다.
"거긴 뭐하는 곳인데?"
"정묘호란 때 인조임금이 용골대에게 항복하고 형제의 맹을 맺은 장소래요."
그런데 지도에는 나오는 연미정이 네비게이션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민통선 지역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지도를 보고 강화대교 아래 굴다리 밑으로 돌아서 북쪽으로 달렸다.
가는 동안 오른쪽 해안에는 모두 철책선이다.
연미정 양쪽에는 5백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1627년 정묘호란을 끝내는 문서에 서명하던 때에 저 나무들은 100살이 넘는 나이였다니...
연미정 성벽 북쪽을 바라보니 북한 땅이 가깝게 보인다.
남북 관계가 얼른 개선되어 예성강, 임진강, 한강이 만나는 이 천혜의 통상로가
다시 옛날 같은 활기를 되찾기를 빌어 본다.
연미정 아래에 원래 이 정자가 장무공 황형 장군의 집이었음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황형 장군은 임진왜란 전에 발발했던 삼포왜란(1510년) 때 제포에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이 집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그 집터에서 입으로만 국방을 외치던 못난 후손은 적에게 항복하는 문서에 서명을 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남자 3대가 함께 한 강화도 여행은 넘어가는 해와 함께 끝났다.
아들은 오늘 보기로 한 유적지를 모두 답사한 것이 매우 흡족한 모양이다.
다음에는 서쪽 편을 돌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짧은 가을 해를 뒤로하고 집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