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1일(목) 비 온 뒤에 구름이 끼었다가 갬
어젯밤에 강한 비가 온 탓인지 새벽에 너무 추워서 잠이 깼다.
제일 높은 곳에 들창이 있어서 그리로 찬 바람이 들어온다. 문을 닫고 싶었지만 너무 높았다. 다른 이불로 연우를 더 덮어주고 다시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뜬 뒤에야 커튼 뒤에 가려진 여닫이 장치를 발견했다. 문을 닫자 자동차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런...
기운을 되찾은 연우와 아침을 먹고 학회장소로 출발했다. 정류장까지 10분 가까이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행사장에 갔다. 3정거장. 연우 전공과 가급적 가까운 주제를 선택해 1층 12호실에서 오전 세션으로 논문 5편 발표를 참관했다. 시베리아와 동유럽 지역 중세시대 원주민들의 복식과 헤어스타일에 관한 내용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댕기머리 땋는 것과 비슷해서 특이한 느낌이 들었다.
왜, 우리는 읽기 위주로 외국어를 배웠는지...행사장에서 나의 얕은 영어능력을 탓할 수 밖에 없었다. 거의 대부분 학자가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기 때문에 자국어의 독특한 억양과 발음이 섞인 영어를 구사했다. 말을 잘해도 강의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발표 자료를 그냥 읽는 발표자도 여럿 있었다.
오전 세션이 끝나고 발표 포스터를 전시해 놓은 리셉션 장소에서 커다란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사서 먹었다. 수백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남녀노소, 국적을 불문하고 계단과 바닥에 앉아서, 또는 같이 온 사람들끼리 서서 이야기를 하며 점심을 먹었다.
그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금발의 서양여자가 웃으며 다가온다. “으잉? 누구지, 여기서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그랬다. 그녀는 지난 7월 연우가 3주간 갔었던 러시아의 극지연구소 시베리아 분소에 있는 연구원 아나스타샤였다. 페이스북에서 자주 봐서 얼굴이 익었던 것. 세상은 참 넓고도 좁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연구소 사람들과 함께 학회에 논문 발표차 참가 한 것이라고 한다. 반가워 하는 정서가 참 한국사람을 닮았다. 세상 어디나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오후 세션은 2층 14호실에서 기후변화가 고고학과 문화재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발표한 논문 7편을 참관했다. 3~4개 논문 발표를 마치면 자유토론을 하고 커피 브레이크를 가진 다음 다시 나머지 발표와 토론을 한다. 먼 길을 온 사람들이 많았는지 발표자 중에는 자기 차례가 오기 전에 식곤증 때문에 조는 사람도 있었고,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제법 있다. 다들 진지하게 집중했고, 충분히 이해를 못했지만 더 알아들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64개국에서 400편이 넘는 논문을 가지고 참가했고, 전시실에는 포스터가 빽빽하게 붙어 있는데, 학자들 모임이라 그런지 시끌벅적함은 전혀 없다. 서울로 돌아간 친구가 한국인은 서울대학교 교수 1명과 우리 부녀 단 3명만 참가한 것 같다고 메신저로 알려준다. 하긴 2학기 개학인데다 이 먼 곳에 누가 일부러 찾아오겠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하다.
저녁 8시에 환영만찬이 있다고 참석하라는 안내멘트가 전해졌다. 4시가 좀 넘어서 우리가 참관한 오후 세션의 발표는 끝났고, 저녁을 먹을 겸 다시 시내로 나왔다.
옛날 수도원을 서점으로 개조했다는 Boekhandel Dominicanen을 찾아갔다. 도미니크 교단의 교회 건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한 큰 건물인데 입구는 아주 조그만 해서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지 않는다면 발견하기 어려울 듯 하다. 3~4층 정도로 개조해 놓은 서점은 유럽의 고민을 재치있게 해결한 것 같아 흥미로웠다. 우리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고대 유적 유물들을 어떻게 재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좋은 사례였다. 건물 주변은 현대적인 상업 건물이 가득 차 있었다.
서점을 나와 마아스트리트 대학을 찾아 걸었다. 1975년에 창설한 역사가 짧은 종합대학인데,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건물은 역사가 오래된 듯 하다. 중세 자유도시나 성곽도시가 중심이 되어 발달된 때문인지 대부분 도시가 지름 2km 내외로 아담했다.
구 시가지를 한 바퀴 둘러 본 뒤 이탈리아 식당을 찾아 파스타를 주문해 먹었다. 마치 우리나라 쟁반짜장처럼 널찍한 접시에 담아 놓은 파스타가 세 사람은 먹고도 남을 만한 양이다. 홍합을 넣어서 만든 파스타가 무척 맛있었고, 암스테르담에 비해 가성비가 매우 좋았다.
석양으로 물드는 뫼즈강변을 따라 숙소로 들어 갔다. 그런데, 우리 방에는 처음 보는 여성이 짐을 풀고 책을 보고 있다가 우릴 보고 인사를 한다. “으잉? 이건 무슨 일이지?” 나는 예약 시트를 들고 프론트에 가서 따졌다. 2인실 프라이빗 룸을 예약했는데 저기 들어온 사람은 누구인가? 체크인할 때 있었던 매니저는 자리에 없고 데스크를 지키던 다른 직원이 예약 내용을 전산확인해 보더니 우리 방으로 왔다. 예약의 착오가 있어서 그렇다고 양해를 구한 뒤, 그 분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안내해 갔다. “영어만 유창했어도 심하게 따졌을 텐데. 분명 2인실 프라이빗 룸을 예약했는데, 어제 체크인 할 때 매니저가 아무 문제없다며, 당신들 방에는 다른 사람 숙박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니...”
한바탕 해프닝이 있은 뒤에 커튼을 걷으니 우리 방 바깥에 누군가 자전거를 주차해 둔 것이 보였다. 자전거 바구니와 핸들이 온통 꽃장식이다. 커튼을 열어 놓고 있었는데 여자 분이 오더니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런 몸짓과 웃음으로 관심을 끈다. 우리도 짐짓 장난스런 표정과 행동으로 응답을 하자 자전거를 잠시 세워둬서 미안하다고 하길래 괜찮다고 답을 해 주었다. 이곳 사람들은 참 우울한 구석이 없어서 좋다.
TV가 없어서 그런지 저녁 시간이 무척 긴 느낌이다.
어제 비가 온 뒤로 신기하게도 완전히 가을 날씨로 바뀌었다.
행사장인 MECC Forum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숙소를 나와 걸어가는 길.
하룻밤 사이에 기온이 완전히 가을로 돌아섰고, 거리에는 조금씩 낙엽이 굴러 다닌다.
숙소에서 정류장까지 걸어서 10분, 거기서 3정류장을 가는 버스는 7분
숙소에서 행사장까지 바로 걸어가면 20분...참 애매한 위치라 자전거가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긴 암스테르담과 달리 대부분 사람들이 정말 점잖고 조용하게 자전거를 탄다.
행사장에는 각 세션별로 논문발표가 진행 중이었다.
1층은 외벽이 유리인지라 밖에서 방해하지 않고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다.
2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부터 60여몀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큰 방까지 공간크기가 다양했다.
미리 점찍어 둔 세션을 찾아 걸어가면서 분위기를 간직하기 위해 유리문 밖에서 촬영을 했다.
우리나라 휴대폰에 요란한 촬영음은 좀 없애야 한다. 외국에 나가면 정말 창피하고 민폐다.
범죄자 하나를 잡기 위해서 우리나라 모든 사람에게 이런 족쇄를 채우는 것은 지나친 오버라고 생각한다.
라이브 사진 기능을 이용해 사진을 찍는 나와 달리 딸래미 휴대폰은 라이브 사진 기능이 없어서
기억과 기록에 필요한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다.
우리가 참관하는 세션에서 논문 4편 발표가 끝나고 토론시간을 갖은 뒤 20분간 커피 브레이크 시간.
전시장으로 나와 둘러 보았다. 고고학과 관련된 산업이 출판, 기념품 이런 것 말고도 꽤 여러가지가 있었다.
전시장 바깥 마당에는 트럭을 개조한 VR 체험장도 있었고, 출
출판, 전시, 컨설팅, 박물관, 연관기술산업 분야 등 다양한 분야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세션도 비슷하게 커피 브레이크 시간이 겹친다.
1개 논문당 15~20분으로 발표시간을 관리하고, 5~7개 논문으로 구성하며
토론 시간도 일정하게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서 학문도 표준화된 산업 같은 느낌을 준다.
참가한 회원들에게는 음료수, 커피 등을 제공해주고 간단한 과자 같은 것도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두었다.
물론 다리 힘이 좋은(?) 사람들이라 거의 대부분 서서 해결한다.
의자에 앉아 보면 네덜란드 사람들의 다리 길이는 특별히 더 긴 것같은 느낌을 준다.
다시 시작한 세션에 들어갔다.
우리 세션의 진행자인 줄 알았던 분이 다섯번째 발표자였다.
사진 촬영을 하지 말라고 가이드라인에 적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시작할 때 여러 사람들이 찍길래 나도 한장 찍었다.
참석자들은 이름표(Name Tag)를 목에 걸고 있는데 발견한 것은 모두 3종류다.
나처럼 희고 굵은 끈, 붉고 굵은 끈, 그리고 붉고 가는 끈...그 차이를 모르겠다.
전시장 안에는 간이 카페티리아가 2개 있다.
주최측에서 운영하는 것인데 커다른 샌드위치 1개와 음료수 세트를 7.5유로에 팔았다.
유럽이 전투적이라고 느끼는 대목이 바로 이런 형태의 식사시간.
샌드위치를 들고 빈 자리를 찾아 가면서 전시장에 게시된 포스터를 둘러 보았다.
이 행사를 가보라고 추천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이런 포스터 하나에도 연구비가 2~3천만원 들어간다고 한다.
포스터는 EAA에서 정해놓은 규격이 있고, 내용에 대해서는 사전에 평가를 받는다.
여기 걸어 놓은 포스터는 학문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가 있는 연구실적이라는 얘기.
학생들의 경우에는 별로도 발표 경연대회를 하고 거기에서 1등을 하면 1,000유로를 상금으로 받는다.
그리고 정식으로 세션에서 발표할 기회를 준다.
학문의 세계에도 레벨이 있다.
고고학은 물론 세상 어떤 학문도 혼자 독립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지리학, 기상학, 문헌학, 의학 .... 인간이 살았던 흔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데는 관련학문의 협력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서서 이야기를 하며 점심을 먹고 있다.
구석에 빈 공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바닥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그들을 바라 보았다.
전시장에는 일본에서 설치한 부스도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그나마 일본이 대접 받는 수준일까?
하긴 지리적으로 먼 유럽과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
하지만 인간의 삶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겉모습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문의 교류가 필요한 것이고....
이 넓은 전시장에 학자들이 가득 가득 하다.
폴란드 엘블라그(Elblag) 지역의 중세 칼 장식에 관한 포스터
이런 칼 장식도 지역별로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건 영화 산업에서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토기를 다룬 포스터
1시간 45분간 점심시간이 주어졌다.
전시장 밖으로 나오니 아침에 내리던 비는 깨끗이 그쳤고, 한국의 가을하늘이 생각날만큼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오른쪽에 보이는 트럭은 VR체험관. 그리고 붉은 건물은 호텔이다.
담배 피우는 것이 좀 자유로운 것이 비흡연자인 나에겐 아주 흠이었다.
멋진 풍경에 고약한 담배냄새는 좀.....
오후 세션으로 논문 발표 5편이 더 있었다.
오후 세션이 끝나고 나서 시내버스를 타고 뫼즈 강을 넘어 도시 서쪽으로 넘어 왔다.
넓은 광장에 웅장한 시청건물.
차가 다니는 공간과 사람이 다니는 공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정신적으로 매우 쾌적하다.
시청광장 북쪽에 있는 요하네스 민켈러스(Johannes Petrus Minckelers)
18~19세기의 위대한 네덜란드 화학자. 그의 동상은 "영원의 불"을 들고 있다.
옛날 수도원을 서점으로 개조했다는 Boekhandel Dominicanen.
입구가 작은 철문으로 되어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인구 12만에 불과한 마스트리히트 중심가에 오프라인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나라는 책이 거의 팔리지 않는다고 하는 나라다.
우리나라 출판사의 초판 1쇄는 5,000부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줄고 줄어 이제는 800부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마저도 다 팔지 못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온라인으로 아무리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깊이 있는 지식과 생각은 한권으로 만든 단행본을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왕성한 지적 호기심이 발달하는 시기에 대학입시에 몰입하며 책을 잃지 않는 문화는
결국 세월이 갈수록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를 만들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책을 읽지 않는 나라에 지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있을까?
올해 들어 <1주 1책>을 하고 있는데, 37주가 지난 지금까지 29권 밖에 읽지 못했다.
야근을 줄이면 업무효율이 높아지고, 가족을 돌 볼 시간이 늘어나고, 책을 읽을 시간도 늘어난다.
그런 사회가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 인구 12만인 마스트리히트에 4층 높이의 오프라인 성당 서점이라니...부럽다.
마스트리히트 대학을 찾아 가는 길에 있는 성 세리바티우스 성당(Basiliek van Sint Servaas)
길에 무지개 무늬 페인팅이 인상적이다.
성당 주변 광장에는 한가한 오후의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정말 조용한 나라다.
골목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마스트리트 대학이 있다.
1975년에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유럽에 이렇게 젊은 대학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찾아가 본 것이다.
대학 구내를 관통해 걷다보면 이렇게 생긴 후문으로 나온다.
마스트리트 대학은 유럽의 대학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우리처럼 캠퍼스가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마스트리트 대학교 앞 거리 모습
가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이 보일 뿐 학교 앞이 정말 조용했다.
4~5살쯤 된 어린아이도 두발 자전거를 야무지게 잘 탄다.
사진으로 찍은 건 이것 뿐인 것 같은데, 아이들을 정말 독립적으로 강하게 키우는 것 같다.
짙은 구름 아래 서 있는 석조건물은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태리 식당에 와서 홍합이 들어간 파스타요리를 시켰다.
2인분씩 주문받는 음식인데 맛도 엄청 좋았지만 양이 많아서 최선을 다했지만 1/3 정도 남기고 말았다.
성당 옆에 내부를 현대식으로 개조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시 숙소로 걸어갔다.
뫼즈 강을 건너 도시의 동서를 잊는 다리는 모두 3개가 있는데 이 다리는 자전거를 싣고 올라갈 수 있게 엘리베이터가 있다.
왼쪽부터 공원, 자전거도로, 차도, 그리고 강변이다.
이런 곳에서 산다면 뭐든 건강한 상태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뫼즈 강변을 끼고 남쪽으로 강변 길이 있다. 어디를 걷건 정말 상쾌한 도시다.
우리가 묵고 있는 스테이오케이 마스트리트 유스호스텔(Stayokay Maastricht).
공식유스호스텔 답게 정말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네덜란드 자전거는 투박하게 생겼지만 주인의 취향에 따라 이렇게 장식을 한 자전거도 있다.
달리는 자전거를 찍을 수가 없어서 눈으로만 봤었는데, 누군가 우리 숙소 옆 공터에 이렇게 세워 놓아길래
사진을 찍었다. 1시간쯤 뒤에 나타난 자전거 주인은 30대 중후반쯤 돼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장난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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