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8일
서귀포는 역시나 아침에 비가 내린다. 오늘 한라산 등산을 시작할 관음사 입구까지 9시 30분 전에 도착해야 한다. 한라산 등산은 계절별로 구간별 통과 제한시간이 있다. 지금은 낮이 길어져 9:30까지는 관음사 매표소를 통과해야 한다. 강 선생님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관음사 매표소를 향해 달렸다. 예상보다 5분 늦게 매표소 주차장에 차를 댔다. 관리인이 우릴 보더니 왕복 10시간은 걸린다고 하면서 삼각봉 대피소를 오후 1시에 통과하지 못하면 정상에 올라가지 못한다고 알려 주었다.
출발하기 전, 한라산을 다 품고 갈테닷!
탐라계곡 길
전체 거리는 매표소~탐라계곡(3.0km), 탐라계곡~삼각봉대피소(3.3km), 삼각봉대피소~정상(2.4km) 왕복 17.4km거리. 09:15분 준비를 마치고 출발했다. 탐라계곡까지 1시간 30분, 삼각봉대피소까지 1시간 30분, 정상까지 1시간 30분 이렇게 4시간 30분을 예상하고 출발했다. 탐라계곡 쉼터까지는 순조롭게 올라갔다. 경사도 완만하고 등산로가 계속 나무그늘로 덮여 있어서 쉽게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새벽에 올라가서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 듯 이른 시간인데 내려오는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연우와 준기를 기특하다고 칭찬하고 지나간다. 구멍 뚫린 현무암이 가득한 화산이라 그런지 계곡에 흐르는 물은 없고 가끔 깊은 곳에 고인 물만 보인다. 4년전 영실계곡길보다 황량하다. 중간에 옛날 숯가마터가 있다. 물이 없으니 사람들이 오래 정착해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었겠다. 예상보다 빨리 1시간이 되지 않아서 탐라계곡 쉼터에 도착했다. 쉼터에 앉아 간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관음사 코스는 이런 구조
한라산 중턱에 있는 옛날 숯가마터
나무데크 길도 군데군데 있는 등산로
15분 정도 휴식을 한 뒤 10시 30분에 삼각봉 대피소를 향해 출발했다. 이 구간은 안내소에서 제일 가파르고 힘들다고 했었던 구간. 햇빛을 가려주던 숲이 옅어지면서 어제와 다른 뙤약볕을 실감했다. 한라산으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낮아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반팔 소매 옷을 입었는데도 더위를 심하게 느낄만큼 강한 뙤약볕. 아내가 속도를 내지 못한다. 쉬엄쉬엄 가는 나를 따라오지 못해 1분마다 뒤로 돌아서서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어제 숙소 옆방에 아기를 데리고 투숙한 사람이 있었는데 밤새 아기가 울고 보채는 소리에 잠을 설쳤단다. 하긴 나도 새벽에 아기 울음소리에 깨서 잠을 설치긴 했다. 길은 밋밋하고 풍경도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 가장 특징이 없는 계절이어서 일까? 가다쉬다를 반복하며 마침내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했다. 12:10분, 그닥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삼각봉 대피소가 보인다. 정말 삼각봉 아래에 있다.
한여름 처럼 더운 날씨에 고생이 많다
삼각봉 대피소는 물이 나오는 시설이 없다. 정말 그냥 비바람을 피하는 대피소인 모양. 준비해간 컵라면을 하나씩 먹고 봉지에 담아간 밥을 나눠 말아먹었다. 대피소 관리인이 13:00 이후에는 정상으로 출발할 수 없다고 주의를 준다. 너무 쉬면 늘어질 것 같아 12:25분 초콜릿과 사탕을 먹으며 대피소를 출발했다. 밥을 먹고 나니 간식거리 몇 개만 남아 짐이 많이 가벼워졌다. 준비해간 물병 4개중 3개를 다 마셨다. 남은 건 600ml짜리 물병 하나.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을 따가운 등산길. 산 옆으로 난 나무 데크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간다. 용진각 대피소 터에 도착한 시각은 12:48분. 2010년 태풍 나리가 쓸고 지나갔을 때 기록적인 폭우와 산사태로 40년 넘게 이 자리를 지켰던 용진각 대피소가 휩쓸려갔단다. 용진각 현수교 근처에서 샘이 솟는다. 돌로 물을 받는 시설을 해 놓은 것으로 보니 오래전부터 있던 샘인가 보다. 사람들을 따라 우리도 빈병 하나를 채우고 잠시 간식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삼각봉 대피소에서 먹는 꿀 맛 같은 점심
용진각 현수교 앞
웃는 모습 찍기 힘든 우리 딸
1,800m 지점에서 발견한 눈과 얼음
힘내! 거의 다 왔어!
등산 속도가 더 늦어지는 듯. 쉬엄쉬엄 올라갈 수밖에 없지만 정상까지 갈 수 있는 시간이 될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머리위에 한참 높은 바위덩어리 뒤 쪽으로 더 올라가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1분도 못 있다가 내려올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냥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간다. 아이들에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격려하며 계속 오르다가 1,800m 지점에서 눈을 발견했다. 이른 봄에 내린 눈이 반은 얼음이 되어 약간 남아 있었다. 가로 세로가 2미터 정도 될까? 13:30분 1,800m 지점을 통과하여 한라산 동봉 정상에 도착한 것은 14:05분. 마침내 한반도 남쪽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도착했다. 시원한 바람과 따끔거리는 햇살이 동시에 몸을 두드린다. 관음사 입구에서 같이 출발했던 특수부대 군인들도 보이고 서양사람들도 제법 있다. 동봉 정상표지에는 기념사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백록담을 배경으로 아이들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14:30분에 모두 하산하라는 안내방송이 계속 나온다. 힘들게 올라온 것에 비하면 너무 아쉬운 시간. 강한 햇살 때문에 산 주변은 선명하게 보이는 풍경은 아니었다.
어이구! 드뎌 도착이다!
우리도 기록사진 하나 남기고...
힘들게 올라온 연우는 성판악으로 내려가면 안되겠냐고 한다. 밋밋한 완경사 하산길이라 관음사보다는 덜 힘들 것 같다는 생각. 그러나 해가 질 무렵에 성판악에 도착하면 다시 관음사까지 오는 길이 곤란할 것 같아 관음사로 내려가야 하노라고 설명을 했다. 내려가라는 방송이 계속 나오는 중에도 정상기념 사진을 찍는 사람들 줄이 계속 이어진다. 아쉽지만 그래도 이만한 등산을 다행으로 위안 삼으며 14:30 하산을 시작했다.
인내심 많은 준기도 하산 완료 1시간 전부터 다리 아프다고 칭얼거렸다. 반면, 올라갈 때는 온갖 잔소리를 다 늘어놓던 연우는 내려오는 동안 군말 없이 잘도 내려간다. 바위산은 등산할 때도 무릎이나 관절에 무리를 주지만 하산할 때는 그 강도가 더 심하다. 이미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관절에 전해오는 고통은 더 괴롭다. 16년 전 설악산 종주 때 오색약수터를 내려오던 기억이 새롭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을 때마다 관절에 고통이 전해온다. 관음사 휴게소에 도착하면 아이스크림 사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내려오는 길은 지루하고 또 지루했다. 바위산은 하산속도가 나지 않는 게 단점. 중년 등산객들은 곳곳에서 스프레이 파스를 뿌리느라 등산로마다 파스 냄새가 고약하다. 관음사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18:45분. 꼬박 9시간 30분 걸렸다. 같이 내려오던 아저씨 한분이 자기들은 11시간이 걸렸다고 아이들이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데드라인에 쫒기는 사람처럼 왕복한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백록담을 보고 왔다는 것에 만족했다. 여름처럼 날씨가 더워서 그랬는지 관음사 휴게소에 있는 얼음과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긴 시간 고통을 참고 왕복등산을 무사히 마친 두 녀석에게 저녁을 먹고 얼음과자를 꼭 사주겠다고 약속하고 시내로 내려갔다.
제주 시내 청해원 식당에서 갈치조림, 한치물회를 시켜 저녁을 먹었다. 먹고 나서 메모를 찾아보니 이 집은 해물뚝배기가 맛있는 집이었다. 식당을 나와서 약속대로 얼음과자를 사주려고 주변을 살피다가 지역주민들이 하는 마트를 발견해 거기에서 얼음과자를 샀다. 가까운 곳에 프랜차이즈 마트와 대기업 마트들이 보였지만 아이들에게 여행을 가면 꼭 지역주민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야 한다고 얘기했다. 대기업 제품은 어쩔 수 없을 때는 사야겠지만 가능하다면 그 지역 주민들 가게를 이용하고 그 지역주민들 농산물을 사야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예약해 놓은 숙소에 도착했더니 역시 중산간 지역이라 바람이 시원하고 거세다. 숙소에 들어가 보니 등산 내내 햇볕에 탄 듯 양팔이 화끈거린다. 다행히 처음으로 모자를 사서 쓰고 간 덕분에 얼굴과 목덜미는 화상을 면했다. 이젠 등산할 때 꼭 모자를 써야겠다. 욕조에 물을 가득 담아 몸을 푹 담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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